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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덧없는 인생사, 봄날은 간다


드라마의 영향일까? 초라한 이정표 하나가 기껏이던 그 곳에 '고종황제와 명성황후의 고장'이라는 요란한 안내표지가 나붙게 된 것은. 그러나 한동안 거기, 그 곳을 눈여겨본 이는 드물었다. 더구나 그 곳에 잠든 이가 조선말 근대초의 그 격랑의 시대를 산, 조선왕조 마지막 두 황제인 고종과 순종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의외로 드물었다.


서울에서 구리시를 지나 춘천 방향으로 가다 보면 남양주시 금곡역 앞 4거리에 이른다. 지금은 이미지까지 더해진 이정표가 있어 입구를 쉽게 찾을 수 있는 4거리에서 우회전해 들어가면 바로 홍유릉 주차장과 능역의 우거진 소나무숲이 기다린다.


홍유릉은 홍릉과 유릉이 합쳐진 이름이다. 홍릉(洪陵)은 조선왕조 26대 고종황제와 명성황후 민 씨의 능이고, 유릉(裕陵)은 27대 순종황제와 원비 순명효 황후 민 씨 및 계비 순정효 황후 윤 씨를 모신 능이다.


능역으로 들어서면 4만여평의 너른 소나무숲이 펼쳐지는데 왼쪽에 홍릉이, 오른쪽에 유릉이 자리잡고 있다. 그런데 홍유릉에 대한 첫 인상은 지금껏 우리가 보아 왔던 능역들과 아주 다른, 낯설지만 새로운 분위기가 느껴진다.


그 낯설음은 홍유릉이 조선왕조의 마지막 왕릉이자 최초의 황제릉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면 곧 이해하게 된다. 조선은 1897년 국호를 대한제국, 연호를 광무, 왕을 황제라 부르게 되었다. 이에 왕릉도 명나라 황제릉을 본받아 능제를 삼고 능역을 다듬었기 때문이다.


홍릉의 홍살문을 들어서면 커다란 석물들이 양쪽으로 서 있다. 그 모양을 보면 아주 이색적이고 파격적이다. 말, 양, 해태, 호랑이, 낙타, 코끼리, 기린 등 다른 능에서 볼 수 없는 다양한 동물들이 등장한다. 고종황제의 신위를 봉안하고 있는 침전 또한 조선왕조 역대의 침전인 정자각과는 형식과 규모가 다르다. 즉 종래의 정자각 대신 정면 5칸, 측면 1칸의 큼지막한 건물이 들어서 있다.


고종은 철종 3년(1852) 7월 영조의 현손 흥선 대원군 이하응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863년 철종이 후사없이 승하하자 12세 어린 나이로 창덕궁에서 즉위하였다. 그러나 즉위 후 고종의 나이 너무 어려 대원군이 국정을 도맡았다. 그는 순종·헌종·철종으로 이어지는 60여년 간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에 신물을 내고 세도정치를 근절시키기 위해 여덟살에 부모를 잃고 고아로 자란 민치록의 딸을 왕비로 책봉한다. 바로 명성황후 민 씨다.


그러나 비극의 역사는 그 때 이미 잉태되고 있었다. 시아버지 대원군과 며느리 민 씨와의 갈등과 대립에 더해 일본과 서구 열강들이 물밀듯이 밀려들어오며 혼란을 더했다. 1882년 임오군란, 미·영·독과의 통상조약 체결, 1884년 갑신정변에 이어 1894년 동학농민전쟁과 청일전쟁이 일어났다.


임오군란 이후 명성왕후는 친청·친로정책을 통해 정치적 기반을 다지려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외교정책에 불만을 품은 일본공사가 보낸 자객에 의해 명성황후는 1895년 8월20일 경복궁 건청궁에서 처참하게 암살되었다(을미사변). 민 씨는 죽임을 당한 2년 뒤인 1897년 한성부 동부 인창방 청량리(현 숭인원)에 초장했다가 1919년 고종이 승하하자 이 곳으로 이장되었다.


고종의 재위 44년간은 외세의 침입이 잇달았던 격동기로, 고종은 이를 막아내고자 노력하였으나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1919년 1월21일 춘추 67세로 덕수궁 함녕전에서 승하했다. 장례일인 3월1일을 기하여 전국에 독립운동이 일어났음은 너무도 유명하다.


홍릉에서 산책로를 따라 이어지는 유릉은 조선왕조 최후의 황제인 제27대 순종(1874~1926)과 그 비인 순명효황후(1872~1904) 및 계비 순정효황후(1894~1966)의 능이다. 이 곳 역시 홍릉과 마찬가지로 황제의 능제를 갖추고 있다. 홍릉보다 뛰어난 솜씨로 만들어진 석물들이 양쪽으로 늘어서 있고, 침전 또한 일자로 자리잡고 있다.


순종은 고종 11년(1874) 2월8일 고종의 둘째 아들로 창덕궁에서 탄생하였다. 광무 원년(1897)에 황태자에 책봉되고 광무 11년(1907) 7월에 고종의 뒤를 이어 창덕궁에서 즉위하였다. 즉위 후 연호를 융희라 정하는 한편 기울어가는 국운을 바로잡으려 하였으나 재위 4년만인 1910년 일본에 병탄되고 말았다. 이후 순종도 단지 이왕으로 호칭된 채 1926년 4월25일 춘추 53세로 창덕궁에서 승하했다.


인적 드문 홍유릉을 천천히 돌아나오는 발걸음은 맑은 햇살에도 그리 가볍지만은 않다. 영욕의 지난 세월을 묻고 웅장한 능과 화려한 석물로 잘 꾸며진 능역에 잠든 그들이 왕이라고 하건만 멈춰진 시간 속에서는 한 인간으로서의 덧없는 인생이 거기 잠들어 있기에.


*가는 요령
구리시 교문 4거리에서 46번 경춘국도로 나가, 양평과 분리되는 3거리 도농동 검문소에서 춘천쪽으로 4 km 지점 금곡동에 위치. 대중교통을 이용할 경우 서울 청량리역에서 시내버스(오전 5시~오후 8시30분 운행)를 타고 금곡에서 내린다(30분 소요. 금곡에서 홍·유릉까지는 5분 소요). 강동구 길동에서도 시내버스가 운행(1시간 소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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