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7년 외환위기 이후 판매 1위를 차지하며 수입차시장을 휩쓸었던 BMW가 지난 10월 이후 3개월 연속 렉서스에 1위 자리를 뺏기면서 올해 전망에 업계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처음에만 해도 상당수 관계자들이 일시적인 현상으로 받아들였으나 이젠 “올 것이 왔다”는 반응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어떤 이들은 “BMW의 시대는 갔다”며 “올해부터는 렉서스가 선두를 유지하고 BMW는 벤츠와 함께 2위 싸움에 나서게 될 것”이라고 단언한다. 과연 그럴까.
실제 BMW는 지난 12월 렉서스에 100대 이상 앞설 것으로 자신했고, 이는 20일경까지만 해도 맞아떨어지는 듯 했으나 25일을 넘어서면서 렉서스가 급속히 따라붙으며 역전에 성공했다. 렉서스의 판매력이 결코 일시적인 바람이 아니라는 걸 증명할 뿐 아니라 올해의 판도를 가늠할 수 있게 해주는 대목이다.
전체 판매대수에선 1위 자리를 놓치지 않았던 BMW가 지난해 10월 2위로 밀려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먼저 BMW가 할인판매의 폐해를 없애기 위해 깎아 파는 걸 금지하면서 고객들과의 치열한 눈치전쟁을 벌였다. BMW차를 사려는 소비자들은 ‘시간이 지나면 할인하겠지’라고 믿었다. 이 회사의 최다 판매모델인 5시리즈의 신형 모델이 10월 나오면서 가장 비싼 등급의 차가 들어와 수요층을 좁힌 것도 요인이다.
토요타는 이 시기, 렉서스 LS430의 신모델과 ES300의 업그레이드 모델 ES330을 판매했다. 당연히 재고를 조절하느라 8~9월 판매대수가 줄었고 계약고객이 10월부터 몰렸다. 국내 소비자들의 특성이 잘 팔리는 차를 더 많이 사는 것이어서 ES330은 불티나듯 팔려 나갔다. 이런 요인들이 업계 순위를 뒤바꾼 것.
토요타는 그러나 자사가 수입차시장 판매 1위로 나선 데 대해 겉으로는 그리 반기지 않고 있다. 일본업체로서 자칫 한국민의 ‘반일감정’을 부추길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실제 토요타는 이런 이유로 국내에 진출한 이후에도 ‘적당히’ 잘 하는 수준을 유지하고자 했다. 그래서 이 회사의 판매목표는 항상 수입차시장 점유율 20%다. 이는 BMW가 1위를 한다고 가정할 때 2위 정도의 순위다.
BMW도 순위변동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고 밝힌다. 김효준 BMW코리아 사장은 “판매대수에 연연하지 않을 뿐 아니라 수입차시장이 커진다는 점에서 렉서스의 분전은 매우 바람직한 현상”이라며 “럭셔리카보다는 대중적인 미국차가 많이 팔리지 못하는 게 아쉽다”고 말했다. 그러나 BMW 실무자들은 지난 연말 렉서스가 선전하자 비상사태에 빠지기도 했다.
문제는 이런 현상이 굳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BMW 관계자는 회사에서 판매순위를 갖고 압박하지는 않으나, 판매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는 데 대해선 심하게 추궁한다는 것. BMW는 그러면서도 할인판매를 재개하는 데 대해선 조심스럽다. 이번에도 딜러들의 과당경쟁을 막지 못한다면 앞으로 정가판매는 더욱 어려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업계에선 BMW가 오랜 기간 1위로 복귀하지 못하거나 3위로 전락할 때는 극약처방을 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점치고 있다. 그 경우 업계 순위는 또 뒤흔들릴 것이라는 예상이다.
BMW와 렉서스가 1위를 놓고 다투는 가운데 ‘세계 최고’라는 벤츠는 국내에서 3위에 머물며 자존심을 구기고 있다. 벤츠가 BMW, 렉서스보다 판매대수가 절반밖에 안되는 건 ‘정가판매’라는 요인도 있으나 BMW가 급성장하는 동안 벤츠 본사가 수입판매사에 국내 시장을 맡겨 놓고 방치한 결과다. 벤츠는 지난해초에야 지사를 설립했을 뿐 아니라 이전엔 수입판매사가 차를 더 주문해도 주지 않을 정도로 국내 시장에 미온적이었다.
벤츠는 지사설립 1년이 지나도록 아직 조직의 체계를 잡지 못해 판매에 전력을 기울이지 못하고 있다. 메르세데스벤츠코리아가 먼저 교통정리가 돼야 강력한 리더십으로 딜러들을 이끌고 판매전선에 나설 수 있으나 아직은 그런 능력이 부족하다. 또 벤츠의 고객이 장년층이어서 판매를 확대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벤츠는 내년 수입차시장 1위를 선언했다. 이 회사는 올해 효성을 비롯해 몇 개 딜러가 가세하면서 판매가 지난해에 비해 30% 가까이 늘어날 것으로 보고 있다. 이 경우 월 판매대수는 300대 중반이 된다. 확실한 3위권을 다지는 동시에 2위로 도약할 수 있는 기틀을 만드는 셈이다. 벤츠는 기존 딜러 한성자동차와 새 딜러 효성의 경쟁이 플러스 알파를 만들어낼 경우 하반기엔 2위권까지 노려볼 만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벤츠는 또 BMW와는 달리 렉서스의 판매증가를 바람직한 현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벤츠 관계자는 “독일 본사에서 렉서스 구입고객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다음 구입차로 벤츠를 꼽았다”며 “이런 점을 감안할 때 결국 벤츠의 판매는 늘어날 것”이라고 장담했다. 2~3년 후 렉서스 고객을 끌어들이게 되면 판매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할 수 있다는 계산이다.
벤츠의 한 딜러는 “토요타가 조직을 우선시하고 상명하달식이어서 의사결정이 빠르다면 벤츠는 민주적이며 개인의 의사를 존중하는 스타일”이라며 “토요타는 딜러를 끌고 가는 반면 벤츠는 함께 가려다 보니 굼뜬 경향이 있지만 결국엔 토요타를 앞설 수 있는 문화를 갖추고 있다”고 비교했다. 이 딜러의 장담이 맞아떨어질 지 궁금하다.
빅3를 제외한 업체들의 움직임은 어떨까. 업계에선 수입차시장의 선두권으로 떠오를 수 있는 후보업체로 혼다를 꼽고 있다. 혼다의 경우 세계시장에서 인정받는 강력한 상품성에 힘입어 국내에서도 잘 팔릴 브랜도로 평가받고 있다. 올 중반기부터 판매에 들어가는 혼다는 당분간은 판매차종이나 딜러 수가 적어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겠지만 2~3년 후에는 현재의 토요타와 같은 실적을 거둘 업체라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혼다도 한국시장에 큰 욕심을 내고 있다. 이 회사 관계자는 “자신이 없는 시장은 들어가지 않고, 들어간다면 토요타를 반드시 이길 것”이라며 “우리의 장기적인 목표는 한국 자동차시장 20%가 점유”라는 의지를 드러낸 적이 있다. 그 만큼 상품이나 마케팅에 자신있다는 뜻이다.
실제 혼다는 올해 처음 내놓을 어코드 기본형의 가격을 3,000만원대 미만으로 맞추는 방안을 검토중인 걸로 알려졌다. 이 경우 수입차업계는 물론 국산차업계에 엄청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국산 그랜저XG나 SM5 고급형과 맞먹는 가격이기 때문이다. 특히 같은 일본차인 렉서스의 피해가 클 가능성이 높다. 소비자들은 렉서스가 고급 브랜드, 혼다는 대중 브랜드로 보지 않고 같은 일본차로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어서다.
선두권까지는 아니지만 상위 업체로 뛰어오를 다크호스로는 푸조를 들 수 있다. 유럽에서 근래 몇 년 새 급성장한 푸조는 일본에서도 2만대 판매를 달성하며 시장을 확장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지난해 판매에 들어간 이후 2,000만원대 하드톱을 앞세워 화제를 불러모은 바 있다. 이 회사는 올해에만 2,000대 판매를 목표로 중위권 도약을 꿈꾸고 있는 데다 획기적인 모델을 잇따라 수입할 예정이다.
아우디의 경우 세계시장에선 벤츠, BMW와 동격으로 인정받는 데 비해 국내에서는 고급차 이미지를 제대로 심지 못해 판매 활성화에 곤란을 겪고 있다. 그러나 아우디 역시 잠재력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브랜드 이미지에 적극 투자하고, 능력있는 딜러를 선정해 과감하게 밀어붙이면 충분히 상위권으로 뛰어오를 수 있다. 또 벤츠와 BMW처럼 지사가 국내에 들어온다면 빅3 체제를 빅4 체제로 바꿀 업체로 꼽힌다.
폭스바겐은 판매차종이 단순하고 차체가 작다는 게 약점이다. 독특한 스타일링의 뉴 비틀로 유럽 최대업체의 체면은 세우고 있으나 다양한 모델이 나오지 않는 이상 큰 기대는 하기 어렵다. 올해 럭셔리카 페이톤이 수입되면 이미지 상승에는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이지만 이 회사의 대표 모델인 골프가 일본에서처럼 대량으로 팔려야 성장세를 누릴 수 있다.
지난해 11월 ‘가격인하’라는 수입차업계 초유의 가격인하책을 들고 나온 볼보는 큰 효과를 봤다. 볼보는 그 동안 BMW를 경쟁업체로 삼아 비슷한 판매정책을 썼으나 재미를 보지 못하자 현실적인 가격을 제시, 고객의 가시권으로 들어갔다. 볼보는 예전 ‘각볼보’로 불리던 차들이 한 때 수입차시장을 휩쓸었으나 이후 모델이 바뀌며 날렵하고 멋있어졌으나 오히려 강력한 라이벌들 틈에 묻히는 부작용을 겪고 있다. 그러나 적절한 가격과 변한 브랜드 이미지가 제대로 정착되면 안정된 판매실적을 낼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90년대 중반 수입차시장의 볼륨을 키우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던 포드, 크라이슬러 등 미국업체들은 획기적인 전략의 변화가 없는 한 어려움을 계속 겪을 전망이다. 미국차들의 경우 95~97년 싼 가격에 힘입어 비약적인 성장을 했다. 당시 미국산 중형급 모델이 국산 중형차 고급형보다 약간 비싼 정도여서 국내 소비자들이 손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외환위기로 원화가치가 급격히 하락하면서 찻값이 뛰었고, 그 때의 문제점을 지금까지 안고 있다.
미국차들은 유럽차, 특히 독일차에 비해 상품성이 뒤진다는 게 일반적인 인식이어서 가격이나 차의 독특한 컨셉트를 인정받아 판매돼 왔다. 그런데도 찻값이 유럽차와 비교해 큰 차이가 나지 않자 판매부진을 겪고 있다. 미국업체들은 이 때문에 지난해 넘치는 재고를 처리하느라 거의 연중무휴 바겐세일을 벌이며 브랜드 이미지 추락을 감수했다. 그래도 미국업체들이 한국시장에서 일정한 시장을 확보하려면 각오하고, 전략적인 ‘박리다매’ 정책을 펼쳐야 한다.
미국업체이면서도 유럽차와 맞먹는 럭셔리카를 판매하는 GM코리아의 경우 적절한 포지셔닝에 실패하면서 곤란을 겪었다. 캐딜락의 경우 올해 SUV 2종이 추가될 예정이어서 모델이 다양해져 판매에 활기를 띨 것으로 보인다. 한 때 수입차시장 선두에 나서기도 했던 사브는 가장 경쟁력있는 가격을 가졌다는 점에서 성장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캐딜락과 사브가 함께 팔리는 구조에서는 캐딜락에 묻힐 수 있어 별도의 판매전략이 필요하다.
국내 수입차시장은 지난해 2만대에 근접한 후 올해는 3만대 가까이까지 치고 올라갈 게 확실시된다. 본격적인 성장세에 접어들었다는 의미다. 이 시장은 1~2년은 현재처럼 고급차가 리드할 것으로 예상된다. 아직도 자동차가 신분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어 기왕 살 바에야 남들에게 대접받는 고급차를 사는 게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이런 현실에선 독일산 벤츠와 BMW 그리고 일본산 렉서스가 시장을 주도할 게 틀림없다.
시장이 더 커져 대중적인 차까지 팔리는 시대가 온다면 매출액면에선 이들 고급차, 숫자면에선 푸조를 비롯해 혼다는 물론 향후 진출할 토요타, 닛산 등 일본차들이 시장을 지배할 가능성이 높다.
자동차전문가들은 일본시장을 감안할 때 수입차가 국내 자동차시장에서 10%까지 점유할 것으로 보고 있다. 즉, 한 해에 10만대 이상 팔린다는 뜻이다. 늦어도 앞으로 5년 내에는 그렇게 될 것으로 받아들인다. 이런 시장에서 진정한 강자는 누가 될 지는, 얼마나 시장을 잘 읽고 한국민들의 기호에 맞는 차를 공급하느냐에 달렸다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분석이다.
강호영 기자(ssyang@auto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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