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우 아카디아로 국내에 소개되면서 부지불식간에 친숙한 이름이 되어버린 혼다 레전드가 그 동안의 부재기간만큼이나 완전히 새로워진 모습으로 돌아왔다. ‘슈퍼 핸들링 AWD’로 대변되는 스포티함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는 이 혼다의 기함에는 혼다만의 독특한 정신세계와 그 가치가 담겨있다. 이런 차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은 분명 즐거운 일이지만, 한국시장에서 새로운 전설을 만들어내려면 작전을 잘 짜야 할 것만 같다.
글 /
민병권(메가오토 컨텐츠 팀)
사진 /
박기돈 (
메가오토 컨텐츠 팀장)
1990년대 초, 3,000cc짜리 임페리얼로 쓴 잔을 원샷하고 있던 대우자동차는 대형승용차 시장을 허망하게 바라만 볼 수 없어서 결국 외국 메이커의 선진 차종을 도입하기로 한다. 제휴선은 일본의 혼다자동차, 차종은 1990년도 말에 데뷔하여 일본과 미국에서 좋은 반응을 얻고 있었던 2세대 레전드였다. 92년 겨울에 제휴를 맺고 94년 봄에 국내 출시를 했으니 대우의 자체디자인을 적용한다던가 사양을 국산화한다던가 할만한 시간적 여유가 (아마 의욕도) 없었을 것이다. 덕분에 말이 대우차지 실상은 혼다차를 반조립 상태로 수입해다 판매하는 형태가 되었다. 엔진이든 변속기든 일본에서 생산된 부품을 통째로 들여다가 조립만 국내에서 했다는 얘기인데, 심지어 초기 생산 분의 스티어링휠에 새겨진 글자는 ‘DAEWOO’가 아닌 ‘ACURA’ 였다. 어큐라는 혼다의 미국 수출용 고급차 브랜드. 운전석이 왼쪽에 있는 미국 수출용의 레전드에 엠블렘과 로고만 바꿔 붙이는 식으로 만들다 보니 에어백이 달린 스티어링휠의 어큐라 로고를 어쩌지 못하고 그대로 판매한 것이었다. 그나마 나중에는 일부 부품의 국산화가 이루어져 이런 점들도 개선되긴 했지만, 워낙 국산화 비율이 낮다 보니 이것이 과연 국산차인가 수입차인가를 놓고 논란이 생기기도 했다. 당시 기아에서 수입해 팔았던 포드의 머큐리 세이블은 OEM방식으로 미국에서 생산된 차에 기아마크만 부착해 팔았으니 수입차가 분명했지만, 아카디아의 경우에는 기준이 모호했던 것이다. (아카디아의 계보에 있는 GM대우의 스테이츠맨이 GM홀덴의 차종을 수입해다 파는 형태가 되면서 역시 비슷한 논란이 일어난 것을 보면 우습기도 하다.)
어쨌든, 태생이 그렇다 보니 차 값(94년 당시 4,330만원)과 부품값이 비싸고 부품공급이 원활치 않은 등 문제가 있을 수 밖에 없었으나, 차에 대한 평가만은 ‘역시 좋긴 좋더라’로 모아졌다. 낮게 깔려 포스를 내뿜는 앞모습과 날렵하고 늘씬하게 빠진 옆 테는 고급승용차이면서도 스포티한 분위기가 물씬했으며, 가변흡기방식의 3.2리터 V6엔진과 더블위시본에 나름 단단하게 세팅된 서스펜션, 긴 휠베이스등이 선사하는 달리기 성능 또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아 고리타분한 모양 일색에 ‘기사 두고 타는 차’일 수밖에 없었던 대형승용차 시장에 선택의 폭을 넓혀주었다. 허나 이것은 장점이자 치명적인 단점이었다. 뒷자리보다 앞자리 중심으로 만들어진 대형승용차는 우리나라 시장에서 설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이는 대우 김우중 회장이 아카디아를 (기사 두고) 타고 다닌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실 수요자 층으로부터 외면을 당하니, 차 좋아하는 사람들이나 젊은 층이 아무리 좋은 반응을 보인다 한들 판매는 신통치 않을 수 밖에 없었다. 고소득 오너드라이버들의 사랑을 받아 일부 개성강한 수입차의 수요를 흡수한 것이 전부였다. 그러다 급기야 IMF가 터지자 헐값인 2,900만원에 땡처리 하고 생산을 종료한 것이 혼다 레전드-대우 아카디아에 얽힌, 10여 년 묵은 전설이다.
세월이 흘렀지만 당시에는 여건이 안되어 아카디아를 바라만 볼 수 밖에 없었던 젊은 층이 그 매력을 잊지 못하고 있다가 이제 나이가 들고 총알이 충전되자 중고차로 구입해서 꾸미고 타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다. 요즘 보이는 아카디아의 대부분은 급조된듯한 대우의 ‘쌍D’마크와 트렁크의 ‘ARCADIA’ 로고 대신 혼다 또는 어큐라의 마크와 ‘LEGEND’라는 로고를 붙이고 다니는 듯 하다. 우리나라에 굴러다니는 혼다 레전드, 어큐라 레전드 중 오리지널이 몇 대나 될까? 물론 가뭄에 콩 나듯 볼 수 있는 레전드 쿠페라면 (국내에서 생산된 적이 없으니)진품여부를 의심할 여지가 없겠지만 그보다는 혼다 마크 밑에 어큐라 로고가 붙어있는, 뭔가 이상한 레전드를 목격하기가 더 쉽다.
잡설이 길어진 것은 이번에 만난 4세대 혼다 레전드가 당시의 아카디아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물론 한 세대를 건너뛰고 다시 들어온 만큼, 실내 외에서 닮은 구석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한가지, 스포티함과 운전성을 추구하며, 뒷자리보다 앞자리 위주로 만들어진 세단이라는 차의 성격만은 그대로이다. 그사이 우리나라에 들어오지 않은 3세대 레전드(96년 출시. 미국에서는 어큐라 ‘RL’로 이름을 바꾸었다.)는 잠시 외도를 하기도 했다. 고루한 모양새에 뭉툭한 느낌을 주는 3세대는 배신, 배반이었다. 하지만, 덕분에 본 모습을 되찾은 4세대로의 변화는 화려하게까지 느껴진다. 우리나라 자동차시장도 많이 바뀌긴 했다. 그러나 수입차 수요층의 상당수는 여전히 보수적이다. 어느 계층에 해당되는 차인지 입장을 분명히 하지 않으면 어느 쪽에도 설 자리가 없어질 것이다. 아카디아의 케이스가 자꾸 생각나는 이유다.
4세대 레전드는 2004년 10월부터 일본과 미국에서 판매되기 시작했고, 우리나라에는 2년만인 올해 6월에 들어왔다. 어코드와 CR-V에 이은 혼다코리아의 세 번째 상품이며, 3년 만에 소개하는 기함이기도 하다. 3세대에 비하면 길이가 6.5cm 짧아진 대신 폭은 2.5cm, 높이는 2cm가 커져 차의 성격변화를 짐작할 수 있다. 다만 기대와는 달리 휠베이스도 11cm가 줄어들었다. 단축된 휠베이스는 아카디아와 비교해도 마찬가지. 2세대 레전드가 앞바퀴 굴림의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프론트 미드십 내지는 ‘V6 엔진을 세로로 배치한 FF’라는 독특한 구성을 채택한 것과는 달리 4세대는 ‘가로배치 V6 + 네바퀴 굴림방식’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짧은 오버행으로 인해 후륜구동으로 착각하기 십상이었던 2세대와는 달리 4세대는 상대적으로 긴 오버행을 갖고 있다. 다만 화살코형 디자인 덕에 앞 오버행이 지루할 정도로 길어 보이지는 않을 뿐더러, 보는 각도에 따라서는 그 반대로 착각할 정도이다. 가로세로는 아카디아보다 2,3cm 작고 높이만 5cm가 높다. 여기에 앞 범퍼부터 트렁크 리드까지 하나의 덩어리로 연결된 듯한 형상과 운전석이 앞으로 쭈욱 나온 캡포워드 디자인이 더해져 실제 크기보다 작아 보이는 면도 있긴 하지만 여전히 단단하고 꽉 차 보인다. 비슷한 덩치가 아닐까 싶은 현대 그랜저(TG S380)와 비교하면 길이는 3.5cm가 길고 폭과 높이는 2cm, 3.5cm씩 작다. 본래 현대의 기함이었던 그랜저가 에쿠스에게 그 자리를 넘겨주면서 낮은 곳으로 임한 것과는 달리, 레전드는 여전히 혼다의 기함이면서도 스스로 작아지는 쪽을 택했다.
레전드는 본디 토요타 셀시오(렉서스 LS)의 경쟁모델이었다. 그러나 라이벌이 덩치와 배기량을 키우며 그야말로 쇼퍼드리븐카로나 어울리는 대형승용차로 자리매김한 것과는 달리, 남다른 노선을 채택한 레전드는 요즘 우리나라 기준으로는 ‘준대형’이라 할만한 사이즈에 머무르고 있다. 최신의 렉서스 LS460과 비교하면 왜소하게 보일 정도이다. 이제 레전드의 일본 내 경쟁모델은 토요타 크라운과 닛산의 푸가 정도로 지목된다. 그나마 내수 판매목표는 월 500대 수준에 불과한 반면 미국에서는 그 세배를 목표로 한다. 국내 수입차 시장에서 비슷한 가격대의 모델을 꼽아보자면 렉서스 ES350, GS300과 인피니티 M35, 독일계로는 아우디 A6 2.4와 BMW 523i 정도가 있겠다. 기함의 자존심을 내세우기 어려운 상황이다.
익스테리어 디자인은 -기함이라는 타이틀의 책임감만 고려하지 않는다면- 선진적이고 여유로운 듯 하면서도 공격적인 자세가 나름 매력적이다. 특히 신형 CR-V가 지나치게 앞서나가느라 조화를 놓친 것과는 달리 레전드는 균형도 잘 잡힌 느낌이다. 다만 17인치인 알로이휠의 모양이 상대적으로 심심하게 보이므로 개성강한 오너라면 이 부분을 먼저 손댈 듯 하다. 후드, 앞 팬더, 트렁크 리드, 서브프레임, 범퍼 빔 등은 경량화를 위해 알루미늄으로 만들어졌다.
재미있는 것은 헤드램프 안쪽의 디테일이다. 상향등과 하향등이 두 개의 실린더 형상을 이루고 있는 것은 특별할 것이 없지만, 라디에이터 그릴 쪽에 위치한 상향등 앞에 BMW(특히 신형 3시리즈)의 엔젤아이를 연상시키는 링 모양이 두드러져 있는 것이다. 물론 미등만을 켰을 때 이 링 부분이 점등된다던가 했더라면 표절의혹이라도 제기했겠지만 그렇지 않기에 더욱 호기심을 자극한다. 레전드의 헤드램프도 다른 고급차들 마냥 어댑티브 프론트 라이팅(혼다) 또는 액티브 프론트 라이팅(어큐라)이라고 해서 램프의 조사각도를 코너링 방향에 맞추어 20도까지 비틀어주는 기능을 갖고 있지만 국내사양에서는 법규 때문에 이 기능이 빠져있어 워셔장치가 달린 평범한 HID 램프로 만족해야 한다. 차간거리 유지장치나, 인텔리전트 하이웨이 크루즈컨트롤, 추돌경감장치 등, 레전드와 혼다의 첨단 기술들도 국내에서 볼 수 없다 하여 안타까운 생각까지는 들지 않는다. 하지만, 키를 가지고 차에 다가서다가 스마트키, 혹은 ‘키 리스 액세스’라 불리는 기능 조차 없음을 깨닫고 나면 다소 억울한 생각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게 꼭 필요한 장비냐고 묻는다면 ‘사지가 멀쩡하니 그렇지는 않소’라고 대답할 수도 있겠지만, 심하게 말하자면 2천만 원대 국산 중형차에서도 만날 수 있는 편의사양인데다가, 혼다의 기함으로서 오너드라이버 중심의 운전성을 중시한, 즉, 하이오너를 겨냥한 레전드의 이미지와 차 값을 생각하면 아쉬움을 느낄 고객들이 많을 듯 하다. 설마 혼다가 기술이 없어서 스마트키를 안달아 놨을까? 레전드에는 2005년 10월에 이어모델이 나오면서 스마트키 시스템이 추가되었고, 미국과 일본에서는 이 사양을 적용해 팔고 있다. 이때 함께 추가된 시트 송풍기능과 후방 카메라 등은 현재 국내사양에도 적용되어 있으니, 스마트키는 수입모델의 사양 결정시 제외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트렁크는 스위치만 눌러주면 전동으로 열리고 닫힌다. 이 ‘파워 트렁크 리드’가 열리고 나면 흔히 볼 수 있는 넓고 평편한 트렁크 바닥대신 들쭉날쭉 입체감이 돋보이는 다소 당황스러운 트렁크 안쪽 공간과 만날 수 있다. 하지만 골프백 4개는 넣을 수 있다고 한다. 트렁크 왼쪽 상단에는 네비게이션용의 DVD와 PC카드를 꽂을 수 있는 드라이브가 달려있다. 가만있자, 네비게이션이라고? 차에 타고 확인해 볼 일이다.
다시 한번 스마트키를 아쉬워하며 리모콘의 버튼을 꾸욱 눌러주면 잠금장치가 해제되면서 문손잡이 안쪽으로 흰색 LED 조명이 들어온다. 오오! 하고 감탄해보지만 색상이 너무 밝은 감도 없지 않다. 이런 조명의 성격은 실내에서도 이어진다. 실내등이나 센터페시아의 조명은 오렌지 톤의 은은하고 아늑한 색상이다. 허나 파란색 바탕에 흰색글씨와 빨간색 바늘로 자체 발광을 하고 있는 계기판은 그렇다 치더라도 발 공간의 조명과 센터콘솔의 컵홀더 주변을 비추는 스팟 램프, 실내 문손잡이와 도어포켓의 조명까지를 모두 파란색 LED로 처리하고 있는 것이 다소 당혹스럽다. 젊은 감각이 물씬한 이 조명선택은 본인의 차에도 DIY를 해야겠다는 각오를 다지게끔 만들어주는 한편으로는, 차의 성격과 타겟 층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끔 한다.
이처럼 화려한 다른 조명들과는 달리 중앙에 큼지막하게 자리잡고 있는 모니터의 화면만큼은 모노톤 위주로 구성하고 있다. 응당히 내비가 나와야 할 이 화면에서는 엉뚱하게도 GPS상의 위도와 경도, 나침반과 날짜, 시간 등을 보여준다. (가끔 왠 여인네가 영어로 안내방송도 한다) 어큐라 레전드에는 실시간 교통정보를 반영하는 음성인식 네비게이션이 장착되지만, 한국용 레전드에는 한국화된 내비게이션이 없다. 그럼, 다른 기능은? 오디오 파트에 ‘DVD’로고가 보이길래 얼른 갖고 있던 영화 ‘카(Cars)’의 DVD를 넣었더니 읽지를 못한다. 다시 잘 보니 ‘DVD-AUDIO’의 로고였다. MP3와 DTS를 지원하고 디스크를 여섯 장 넣을 수는 있어도 영화는 못 본다. TV도 DMB도 없다.
전원을 켤 때 혼다 로고를 보여 주는 것을 시작으로, 후진할 때 후방 카메라 영상과, 트립컴퓨터, 계산기와 달력, 오디오 정보 등이 제공된다. 역시 비디도 기능이 없는 모니터는 아쉬움이 크다. 그 위로 거리를 두고 자리잡은 보조 정보창에는 좌우 공간의 실내온도와 오디오 정보, 시계 등이 표시된다. 없어도 그만일 것 같았지만 즉각적인 정보파악과 관련 기능의 조작에 있어서는 제법 유용했다.
모니터와 보조 정보창을 운전석의 계기판과 한 덩어리로 묶어주는 대시보드 상단의 입체감 있는 조형은 볼륨감과 깊이감에서 돋보이는 ‘리얼 우드 패널’과 함께 시각적 포만감을 선사한다. 이 나무장식은 고급 가구회사에서 수제작에 가깝게 만들어 납품한다는 물건으로, 양 끝단에서 도어핸들과 만나면서 도어트림까지 이어지는 입체감 있는 구성이 돋보인다. 물론 세세한 디테일들에서 뛰어난 마무리가 엿보이기 때문에 은연중에 아 역시 고급차구나 하고 느끼게 되는 모양이다.
공조장치와 오디오 파트, 조그셔틀 모양의 조작스위치가 차례로 자리잡은 센터페시아는 그 아담 사이즈와 색상, 질감이 영락없이 일제 미니 컴퍼넌트 오디오의 모습이면서 한편으로는 볼보의 센터스택도 연상시킨다. 탑재된 오디오는 BOSE와 차량 설계 당시부터 협력했다는 레전드 전용의 5.1채널 시스템. 공조장치는 GPS 정보에 따라 태양의 위치를 계산하여 이를 냉난방에 반영하는 기능도 담고 있다. 막상 조작할 필요가 있더라도 조그셔틀 보다는 주위의 평범한 스위치들에 손이 가는 듯하다.
시프트레버 주변으로는 운전석과 조수석 시트의 열선/송풍 기능을 3단계씩 조절할 수 있는 스위치와 시거라이터가 자리잡고 있다. 이와는 별도로 센터콘솔의 암레스트 안쪽에도 전원소켓이 들어있다. 암레스트는 조개처럼 좌우로 펼쳐지며 얕은 수납공간이 나오고 뒤로 젖히면 깊은 수납공간이 나오는 구조이다. 그 앞에 위치한 컵홀더 역시 다단계로 만들어놓아 이것저것 여러 사이즈를 꽂아보고 싶게 만든다.
머리 위의, 오버 헤드 콘솔에는 선루프 조작 스위치 외에 후방 시야확보를 위해 뒷좌석의 헤드레스트를 눕힐 수 있는 버튼과 뒷유리창에 전동 차양막을 칠 수 있는 버튼이 자리잡고 있다. 후진기어를 넣으면 차양막이 자동으로 내려가지만 기어를 뺀다고 해서 다시 올라가 주지는 않는다. 측면 유리창에도 수동이긴 하지만 차양막을 마련해 놓았다. 이렇게 보면 뒷좌석도 어느 정도 배려하고 있는 듯 하지만 편의성과 공간면에서 앞좌석과 뒷좌석은 확연히 구분된다. 앞좌석은 조수석까지 8웨이 전동조절 시트에 열선/송풍 기능을 갖고 있는 반면, 뒷좌석은 열선조차 없고 공간도 넓게 느껴지지 않는다. 센터콘솔의 뒤편에 자리잡은 뒷좌석용 송풍구와 암레스트의 컵홀더를 제외하면 편의사양도 찾아보기 힘들다. 암레스트에는 조작 스위치는 커녕 수납공간조차 들어있지 않다. 그럼 역시 앞자리를 위한 차란 말인가?
앞좌석의 헤드레스트는 확장식으로 머리에 닿도록 맞추게 되어있다. 계기판은 중앙에 속도계, 좌측에 엔진회전계, 우측에 연료계와 수온계를 배치하고 있고, 속도계 하단으로 멀티인포메이션 디스플레이(MID), 회전계 한 켠으로 변속 상태 표시부를 두고 있다. 회전계의 레드존은 6,700rpm부터. MID는 세팅에 따라 공조장치와, 공기압, 트립컴퓨터, 정비주기등의 정보를 제공하며, 무엇보다 SH-AWD의 작동상황을 표시하는 역할을 한다. 인텔리전트 나이트비전 옵션을 선택하면 이 계기판 위쪽으로 전용 모니터가 팝업식으로 튀어나오도록 되어있지만 국내에서는 볼 수 없는 장비이다.
드라이브 바이 와이어 쓰로틀의 입력장치인 가속페달은 오르간처럼 바닥에 축을 두고 있고 족동식 주차 브레이크를 채택하고 있다. 하늘하늘한 커버가 독특한 시프트 레버는 버튼의 형상이 포르쉐나 맥라렌 SLR의 시동스위치를 연상시킨다. 변속기는 5단짜리 시퀀셜 스포트시프트. 연비와 승차감 위주로 프로그램된 D모드에서는 지루할 정도의 반응으로 가속페달을 밟을 때 은근히 스트레스를 받지만, 수동-M모드로 전환하면 스티어링휠에 얹은 손가락으로 +/- 패들을 당겨 변속할 수 있으므로 훨씬 적극적인 운전이 가능하다. 회전수가 레드존을 치더라도 운전자의 조작 없이는 자동으로 시프트업 되지 않는다. 시프트업 조작 후의 반응이 한두 템포 늦은 것은 흠이지만 간헐적으로 스포츠 주행을 즐기기에 무리가 따를 정도는 아니다.
구형의 C35A와는 계보를 달리하는 J35A엔진은 뱅크각을 60도로 줄여 작고 가볍게 만든3.5리터 V6로, SOHC 밸브 구조에 혼다의 가변밸브 시스템인 VTEC을 적용했다. 이외에 압축비를 11:1로 높이고 밸브크기를 키우는 등의 변화를 거쳐 같은 배기량의 구형 엔진보다 85마력이 더 높은 300마력의 최고출력을 낼 수 있게 되었다. 일본 자동차 업계는 1990년부터 내수용 모델의 출력을 280마력 이하로 제한해오다 2004년 들어 이 자율규제를 폐지하게 되었는데, 때마침 이 선을 넘어 등장한 첫 모델이 레전드여서 더욱 화제를 모았다. 일본에서는 300마력이지만 미국에서는 290마력, 우리나라에서는 295마력으로 표기한다. 최고출력은 6,200rpm에서 나오며, 낮은 회전수에서는 차량 중량 (약 1.8톤)에 눌려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몰아붙이지 않는 이상 300마력짜리 차라는 것은 실감하기 어렵다.
한편, 풀 듀얼 배기시스템에 가변유량 사일렌서를 쓰고 있으며 액티브 노이즈 컨트롤(또는 Active Noise Cancellation) 기능을 적용해 소음은 억제 되고 있다. 이 ‘잡음 제거’ 장치는 천정에 내장된 두 개의 마이크가 저주파수의 잡음을 캐치한 후 오디오의 앰프와 스피커를 통해 반대 주파수를 내보냄으로써 잡음을 상쇄시키는 역할을 한다. 범위는 10dB까지. 고급세단이라는 굴레에 묶여 스포티한 배기음은 포기한 셈이다. 다만 상대적으로 노면에서 들리는 타이어 마찰음과 바람 소리가 두드러진다.
서스펜션은 앞 더블위시본, 뒤 멀티링크의 구성으로, 단단한 듯 하면서도 천천히 출렁거리는 느낌이 든다. 서스펜션은 구성품의 상당부분을 알루미늄으로 만들어 무게를 줄였다.
사실 자동차 전용도로를 내달릴 때만 해도 별다른 감흥은 느낄 수 없었다. 레전드의 진가는 와인딩 로드에서 드러났다. ‘4WD 스포츠세단’이라 할 수 있는 레전드는 기존의 네바퀴 굴림 승용차들처럼 안정성을 확보하는 것은 물론이고 정상적인 노면에서의 운전성-핸들링 성능까지 확보하기 위해 유래 없는 구동력 배분을 실현시켰다. 앞뒤 배분을 7:3에서 3:7까지 가변 시킬 수 있을 뿐 아니라 후륜 디퍼렌셜에 전자식 클러치를 달아 뒷바퀴의 구동력을 좌우 어느 한쪽으로 100%까지 몰아줄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왼쪽으로 선회하는 경우라면 오른쪽 뒷바퀴에 구동력을 몰아주어 차의 회전을 돕는 식이다. 이에 더해 후륜에는 증속기구를 달아 코너링시 요(YAW)를 증가시키도록 했다. 이 시스템에 붙은 명칭은 SH-AWD, ‘슈퍼 핸들링 올 휠 드라이브’의 약자이다. ‘슈퍼 핸들링’이라는 수식어가 세단에, 그것도 고급 대형차에 붙게 될 줄이야… 그야말로 혼다답다. 속도계 하단의 MID를 통해 SH-AWD는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가감속과 경사의 변화에 따라 앞뒤 구동력 배분이 쉼 없이 바뀌는 것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한동안은 이것만 들여다보고 있어도 재미있다. 문제는 코너링을 위해 스티어링휠을 돌린 상태에서는 MID를 들여다보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차라리 놀고 있는 센터 모니터를 통해 큼지막하게 SH-AWD의 작동상황을 볼 수 있다면 하다못해 동승자라도 재미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어쨌든 좁고 굴곡이 심한 도로로 들어서자 SH-AWD도 바빠졌다. 코너를 하나씩 둘씩 돌아나가고 조금씩 속도를 높여가면서 내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이런 덩치의 차가 이 속도로 여길 돌아도 되는 거야? 게다가 이렇게 자연스럽게…??’ 승차감과 정숙성을 포기하지 못한 245/50R17 사이즈의 미쉐린 파일럿 HX MXM4 타이어가 간헐적으로 비명을 질러대는 동안에도 레전드는 그 어떤 불안한 거동도 없이 코너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앞바퀴 굴림에서 예상할 수 있는 언더스티어 현상을 보이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길 밖으로 밀려나지 않도록 보조해주는 정도의 역할을 넘어 아예 운전자가 원하는 방향으로 좀더 밀어주는 듯한 움직임을 보이니 감탄이 절로 날 수밖에. 물론 기술을 맹신하는 것은 무모한 짓이지만, 적어도 ‘슈퍼 핸들링’이라는 엄청난(!?) 말을 제품에 붙여버릴 정도로 자부심을 가질 수 있었던 혼다의 기술력에는 고개를 끄떡여줄 수밖에 없었다.
시승 초반까지만 해도 어코드와 큰 차이를 보이는 레전드의 가격표가 내심 불만이었다. 하지만 차를 반납할 시간이 가까워올수록 ‘돈을 더 주고라도 사고 싶은 차’쪽으로 생각이 이동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경쟁모델들의 목록은 하얗게 지워졌다. ‘나이야 어찌됐든 정신연령이 젊은 오너 드라이버용의 고급차로서, 바쁜 일상 속에 자신의 뜻대로 움직여주는 차를 통해 즐거움을 얻을 수 있도록 한다’라는 컨셉으로 만들어졌다는 혼다의 기함 레전드. 당신의 생각에 동의합니다. 하지만 부디 현명하게 처신하시길 바랍니다.
☞ 혼다는 앞으로 레전드 외에 다른 모델들 – 아마 스포츠카나 SUV –에도 SH-AWD를 적용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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