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 중고차업계는 선진화돼 있다는 점에서 한국 중고차업계의 나아갈 바를 보여주고 있다. 서울자동차경매장은 이에 따라 매월 자사 사외보인 \'오토옥션리뷰\'에 일본 \'유스트카\'에 실린 칼럼들을 번역, 연재해 국내 중고차업계에 유익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오토타임즈는 서울경매장의 협조를 받아 이를 싣는다. 편집자
<평화오토주식회사 대표 아베 마사토시>
능력이 뛰어난 중고차 수출 전문경영자들의 공통점으로 독자적인 세계관, 경영철학을 들 수 있다. 특히 이번 호에 등장하는 인물은 지금까지의 그 어떤 경영자들보다 매우 대단한, 한 마디로 국내 최고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다. 누구에게나 인정받는 중고차 수출 전문회사 경영자 아베 마사토시를 소개한다.
처음부터 수치로 계산해서 이야기해 보자. 올해 상반기 결산결과 수출대수 2만5,000대, 매출 125억엔을 기록했다. 이는 전년인 88억엔과 비교하면 약 1.4배 증가한 셈이다. 정말 경이로운 신장률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2년 전 입사한 신입사원들의 급성장으로 이 같은 놀랄 만한 업적을 세웠으며 회사 발전에 큰 공헌을 한 결과다. 항상 회사 발전에 대해 직원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않는 사람이 있는데 그가 바로 오사카 이즈미찌쯔시에 본사를 둔 평화오토주식회사 대표이사 아베 마사토시다.
1963년생인 그는 불혹을 이제 갓 넘긴 나이로 연륜으로 볼 때는 경영자로서 아직 미숙한 단계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해를 거듭할수록 평화오토를 정상적인 궤도에 올려 놓기 시작했고 항상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나이를 초월해 앞으로 더 많은 변화가 펼쳐질 것으로 기대된다.
그는 또 중고차 수출업계에 있어서 아주 주목받는 기대주이자 경영자로 평가받고 있다. 아베 마사토시는 JU오사카의 이사를 시작으로, 사카이시에 있던 경매장 \'옥스톱옥션힐즈\'를 운영하는 등 자동차경매업계에서는 꽤 알려진 아베 야스의 장남이다.
1998년 갑자기 쓰러진 아버지의 뒤를 잇게 된 그는 당시 회사상황으로 볼 때 가족 경영으로는 회사의 존속이 어렵다고 판단, 외부 비판을 받으면서도 사내개혁에 전력을 다했고 불과 4년만에 최고의 중고차 수출 전문회사로 변신을 꾀할 수 있었다. 그 것을 증명할 수 있는 게 앞서 말한 올 상반기 사업실적 수치다.
그를 자세히 보면 동안의 얼굴로 외관상으로는 이 같은 사내 개혁을 강단있게 할 것 같아 보이지는 않는다. 유능한 독수리는 항상 발톱을 숨긴다고 하듯 아베 마사토시는 유능한 독수리과에 속하는 그런 사람인 것 같다.
3시간동안 인터뷰를 하면서 동석한 사람은 이 회사의 임원으로 관리본부장과 경영기획실장을 역임한 요코쯔쯔미 토시히토였다. 그는 5년 전 회계사무소에서 스카우트돼 입사했고, 경리재무에 능통하며 평화오토의 약진에 일익을 담당하는 인재였다.
오사카의 쿄센키타항을 내려다 볼 수 있을 만큼 높게 솟은 키라센 센터빌딩. 이 빌딩의 9층이 이 회사의 본사로 약 200평을 사용하고 있다. 오사카 미나미항 카―시티에 있던 본부와 2개로 분사해 있던 부문을 통합, 모두 이전한 게 1998년 6월이다. 전 사장인 아베야스가 세상을 뜬 바로 그 다음달이었다.
\"그 때 아버지의 보험금으로 빌딩을 샀다는 소문이 주변에서 꼬리를 물고 퍼지고 있었지요. 참 말도 많았습니다\"
그는 당시를 회상하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실제로는 아무 근거도 없는 루머였지만 그런 비슷한 사례를 우리 주변에서도 많이 볼 수 있고, 당하는 사람도 더러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경우는 루머치고는 상처가 컸고, 마침 사내개혁을 착수하고 있었던 시기라 더욱 그 소문이 무성해져 가기만 했다.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우선 아베 마사토시의 과거 일들을 되짚어 보자. 중학생 시절부터 20세 초반까지 그는 실로 나쁜 일, 좋은 일 등 우여곡절을 몇 번이나 반복하며 결코 평범하지 않은 삶을 살아 왔다. 지금에 와서는 그러한 경험들이 오늘의 그를 존재하게 한 게 아닌가 생각되기도 하지만 말이다.
\"주변에서는 저를 항상 평범한 아이로 생각했고, 학교에서도 말 잘 듣는 아이쯤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저는 혼자 새벽 3시에 일어나서 공부할 만큼 욕심도 많았고, 사립 중고등학교가 있는 유명한 학교에도 진학했습니다. 그런데 중학교 2학년 때 무면허운전으로 경찰에 훈방조치를 받고 이런 좋지 않은 일들이 몇 번 반복되면서 결국 3학년에 퇴학을 당하게 됐습니다. 어쩔 수 없이 공립 중학교에 전학가게 됐고, 그 것이 저의 일생에서 최초의 파란이었습니다\"
중학교 때 이미 그는 고교 1,2학년 공부를 했던 터라 공립 중학교에 진학해서는 뭐를 해도 학년 톱을 달릴 수 있었다. 그 것으로 천하를 얻은 것 같았고 그 때부터 학교를 아무 것도 아니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날이 갈수록 학교를 빠지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공부시간도 점점 줄기 시작했다. 고교 진학을 목표로 열심히 공부하는 아이들과는 반대였기 때문에 성적도 급격히 떨어졌다.
\"어느 고등학교도 합격할 수 없는 상태까지 이르게 됐고 결국 선생님에게 반강제적으로 떠밀리듯이 미에현에 있는 사립학교를 가게 됐습니다. 이 학교는 전교생이 모두 기숙사 생활을 해야 하며 인간형성에 전력을 다하는 수행도장같은 곳이었습니다. 공부보다는 \'어떤 일이라도 전력을 다해라. 이 것도 저 것도가 아니라 한 가지 일에 최선을 다해라, 뭔가 밝게 빛날 수 있는 일을 만들어라\'는 그런 종류였습니다. \'하늘의 뜻만 기다릴 게 아니라 스스로 열심히 노력하고 최선을 다해라\' 아침부터 저녁까지 항상 이런 식이었지요\"
속박과 강제적인 생활이 거듭되면서 싫고 개운치 않은 기분은 점점 심해졌고, 그가 3학년 부학생장이 되면서 80명의 학생과 집단탈주를 시도하기에 이르렀다. 이 것이 화근이 돼 결국 퇴학을 당하게 됐지만 말이다.
\"그 학교가 좋았다는 건 나중에 사회에 나가서야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동창회에서 만나는 동창들이 마치 전우처럼 느껴졌거든요. 전력을 다해서 스스로의 힘으로 하라는 가르침은 지금 제 경영방침 속에서도 큰 기둥이 되고 있습니다\"
덧붙여 말하면 아베 마사토시 동기로 집단탈주 때 학생회장이었던 친구가 아베 마사토시를 보좌하는 영업본부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같은 학교 출신자가 또 한 사람 있는데, 현재 평사원으로 일하고 있다.
고교를 중퇴한 아베 마사토시는 24세까지 6년간의 삶을 그다지 자랑스럽게 얘기하지는 못했지만 그럭저럭 가업을 잇는 일로 소일을 삼았다고 한다. 그러나 남들보다 장사를 잘하고 능력도 있었던 그가 게임계에 뛰어들면서 19세 되던 해에는 2개월만에 1,000만엔이나 되는 순이익을 올리기도 했다. 그 후 20세부터 22세까지 벌렸던 통신판매에서도 1억엔을 벌었다고 하니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일들을 해냈다고 할 수 있다.
\"모든 욕망을 충족할 만큼 아낌없이 돈을 쓰고 다녔습니다. 부정하게 번 돈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따라서 그러한 생활이 계속될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에는 그 돈을 모두 탕진했고, 젊어서 인생의 절정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경험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으로서는 최악의 시기였던 것 같습니다. 안은 텅텅 비어 있었고, 정신적으로도 어느 것 하나 충만한 것이 없었으니까요. 어떻게 하면 좋을까 많은 고민 끝에 결정한 것이 가정으로 돌아가 충실하게 한 걸음, 한 걸음씩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양친의 이혼 등으로 어렸을 적부터 가정적인 단란함을 느끼지 못하면서 그는 기분 내키는 대로 살았고 결국 무일푼 신세가 됐다. 이 것을 계기로 아버지의 일을 돕게 됐고, 그 때부터 효(孝라)는 것에 눈을 뜨기 시작한 것 같다.
아버지가 경영하고 있었던 평화오토는 중고차의 도,소매가 주 업종인 회사였다. 고객은 큐슈, 시코쿠, 오끼나와 주변의 섬까지 퍼져 있었으며, 그 나름대로의 신용을 쌓아 영업망을 구축해 놓고 있었다. 회사설립은 1966년이지만 그 전신은 평화오토상회로 1961년에서 1962년경에 창업돼 오토바이를 주로 취급했다.
아버지와 그의 친구가 동업으로 평화오토상회를 인수했고, 그 것이 법인화되면서 평화오토주식회사로 개칭됐다. 그러면서 아버지가 사장에 취임하게 됐으니, 엄밀히 말하면 아버지가 2대 경영자인 것이다. 그리고 현재 사장인 아베 마사토시가 3대째가 아니라 원래는 4대째 사장이다. 아버지가 쓰러지면서 몇 개월은 다른 사람이 사장직을 수행했기 때문이다.
아베 마사토시는 말한다. \"지금의 평화오토는 회사명은 같지만 그 안을 살펴 보면 전혀 달라요. 제가 사장이 된 건 1998년 10월이고, 그 이전 수 년동안은 전무로서 사내개혁을 주도했습니다. 임원을 포함해 사원을 재정립시키고 이 것을 끝낸 후에야 비로소 사장으로 취임하게 됐습니다. 업무내용도 국내부문을 폐지하고 수출만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저는 창업사장이라는 인식을 강하게 표출할 수 있게 됐습니다. 물론 아버지께서 만들어 놓으신 인맥들도 소중히 생각하고 있구요\"
평화오토가 해외부를 신설하고 중고차 수출에 뛰어든 건 1992년. 그 때부터 약 11년이 지난 현재 중고차 수출업계의 톱 위치에 오르게 된 것이다. 그 것도 수출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게 아베 마사토시가 사장으로 취임한 해부터라고 하니 불과 5년밖에 되지 않는 셈이다.
\"도매와 소매만을 해오신 아버지와는 경영방침이 완전히 다릅니다. 아무튼 장사의 방법부터 사원을 대하는 자세까지 100% 바꾸지 않으면 평화오토는 살아남을 수 없는 상태까지 와 있었던 것입니다. 부친이 계실 때는 수출부문이 미약하나마 성장을 해서 이익도 어느 정도 나오고 있었지만, 국내부문은 경기가 나빠지는 것과 동시에 계속 적자를 면치 못하고 있었습니다. 더우기 회사 내에서는 구태의연한 온정주의 관계에서 중복계산 소비로 인해 수출로 올린 수익도 모두 없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조직을 대폭 줄이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어렸을 적부터 아버지와 함께 일해 온 분들도 많이 계셨지요. 대단한 고통이 따랐습니다. 당시의 상황 속에서 변하려고 생각해서 변한 게 아니라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개혁을 하려고 했던 아베 마사토시에게 저항보다는 옛 동료들끼리 불화가 생겨 굉장히 애를 먹었다고 그는 말한다. 이 쯤되면 여기서 이야기를 앞으로 돌려보자. 집으로 돌아온 아베 마사토시는 어떻게 됐을까.
\"당시 아버지는 옥스톱 경매장의 경영에도 손을 대고 있었습니다. 평화오토의 일이 아닌 단지 경매장측의 도움요청이 있어 개입하시게 됐고 저는 차 매집에 전력을 다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사무국장 등을 역임했고, 3년이 지나서야 평화오토에 다시 입사하게 됐습니다. 저도 경매장에서의 경험은 중고차 유통구조 등을 알게 되는 계기가 돼 아주 좋았습니다\"
신입사원처럼 세차부터 출발한 아베 마사토시에게 어느 날 아버지인 사장이 왠지 무역이 훨씬 나은 것 같다고 말했다. 러시아 배이 자주 오고, 선원들이 싼 중고차를 사간다는 얘기를 언뜻 들은 것 같았다. 장사수완이 좋았던 그는 이 것을 놓치지 않고 한 번 해봐겠다고 생각했다. 이 것이 무역, 수출에 발을 들여 놓은 계기가 됐다.
\"무역이 훨씬 나을 것 같다고 말씀하신 아버지의 직감은 정말 대단했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장사에 대해서는 그 때까지의 경험으로 다소 프라이드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러시아 선원들에게 헐값에 한두 대 팔면서 자기 나름대로의 판매방법이 생기고 본격적으로 판매에 신경을 쓰게 됐습니다. 회사와 좀 떨어진 곳에 조립식 주택을 짓고 책상을 3개 정도 준비했지요. 스텝도 두 사람 정도 배치했습니다. 지붕을 만든 것만으로도 안채를 얻은 기분이라고 아버지에게 말한 게 기억나기도 합니다\"
그의 얘기는 계속됐다. \"러시아 선원들을 직접 상담해서 판매했습니다. 그러던 중 뉴질랜드에 많은 중고차가 수출된다고 들어 현장을 가보자고 생각해 바다를 건너가 보기도 했습니다. 또 중고차센터 등을 방문하기도 했는데 그 때 그 업자들로부터 무역하는 법 등을 많이 배웠습니다. 오사카에는 수출을 해서 돈을 버는 업자가 이미 꽤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그러한 중고차가게에도 거래를 하고 있었으므로 그 곳에서 무역이 훨씬 낫다고 들으신 것 같습니다\"
러시아와 뉴질랜드를 상대로 중고차를 팔면서도 월평균 20~30대, 많을 때는 50대 정도를 처리했으나 주류는 러시아 선원들에게 직접 판매하는 것이었다. 경비도 들지 않고 현금거래가 주를 이뤘다.
\"무역이라기 보다는 눈 앞에서 돈을 번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뉴질랜드는 상사를 통해 월 5~6대 정도 수출했습니다\"
수출에 눈을 떴다고 할까, 무역의 재미를 알게 된 건 나라에 따라 핸들 위치가 다르고 규제가 있어 일본차가 수출될 수 있는 곳은 우측 핸들밖에 수입할 수 없는 나라라는 것을 알게 된 때부터였다. 그 때가 해외부를 발족시켜 2년이 막 지나던 때였다.
\"단지 일본차 붐으로 인해 팔리는 차는 영속성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일본차가 우핸들 수입국에 대해서는 판매시장으로서의 가치가 충분하므로 본격적으로 사업에 뛰어들었습니다\"
일본의 중고차가 해외에서 팔리는 최대 요인이 우수한 품질로 평가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필자는 아베 마사토시의 얘기에 어느 정도 저항을 느꼈지만, 냉정하게 생각해 보니 팔리는 요인은 그의 견해가 품질보다도 상위의 개념으로 자리하고 있다는 걸 알고 고정관념을 접기로 했다.
뉴질랜드를 주요 표적으로 한 해외부는 얼마 되지 않아 월평균 500대 규모가 됐고, 사원을 증원해 수익도 점점 좋아지게 됐다. 그러는 한편 버블경제가 붕괴되면서 고전에 고전을 거듭했고, 회전자금에 지장이 오기 시작했다. 흑자도산이라는 사태도 초래하게 됐고 회사경영에 대해서 그는 사장인 아버지와 자주 부딪치게 됐다.
\"제가 전무가 된 게 1995년이었습니다. 만일 도산이 되면 그 책임은 아들인 저에게 있고, 아버지의 얼굴도 다시 볼 수 없을 것 같다고 계속 아버지를 설득한 결과 개혁의 불꽃은 지펴지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의 갑작스런 병환이 있고 얼마 되지 않아 사장직에 취임한 그는 평화오토를 지켜 온 국내부 폐쇄에 돌입했는데 그 때가 1999년 3월이다. 70명 정도의 사원이 모두 떠났다. 혈관, 세포까지 모두 바꾸는 대개혁을 이루고 중고차 수출전문의 새로운 평화오토주식회사로 재탄생했다.
\"자신을 믿고 처음으로 시도한 개혁입니다만 도중에 몇 번이나 후회도 했습니다. 원래 역경에는 강한 편이어서 고난을 극복하고 다시 일어설 수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만 사원을 해고할 때는 정말 대단한 각오가 아니면 감당하기 힘들었습니다. 상황을 잘 모르는 외부사람들은 많은 비난을 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기울어져 가는 회사의 재생을 목표로 고전한 날들을 상세하게 설명하는 아베 마사토시가 개혁을 달성한 후 불과 4년만에 경이적인 신장세를 보이고 있다.
\"목표를 뉴질랜드로 특화한 지 4년, 지금은 월간 1,500대를 보내는 등 최고의 기록을 보이고 있는데 그러나 시장점유율은 10%에 조금 못미치고 있습니다. 세계를 누비는 무역상이 더 멋있고 좋을 것으로는 생각되지만 그 것보다도 우선 뉴질랜드의 시장점유율을 20~30%로 목표를 잡고 5년 후에는 50%까지 올릴 계획입니다\"
< 번역 : 서울자동차경매 신경식 >
추가정보를 입력해주세요!
서비스(이벤트, 소유차량 인증 등) 이용을 위해, 카이즈유 ID가입이 필요합니다.
카이즈유 ID가 있으신가요?
카이즈유 ID를 로그인 해 주세요.
SNS계정과 연결되어, 간편하게 로그인이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