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경섭 : 베를린 공과대학 자동차공학과 박사과정]
독일에는 자동차 서비스클럽이 무려 10여개나 된다. 그 중 가입회원이 가장 많고 서비스규모가 크며 일반에게 잘 알려진 곳은 단연 아데아체(ADAC)다. 자동차클럽의 고전적인, 그러나 가장 중요한 서비스인 자동차의 응급수리 서비스는 오토모빌폰도이칠란트(AvD)가 각종 테스트나 여론조사에서 항상 최고의 점수를 얻는다. 비록 우리에겐 생소할 지 모르지만 AvD는 독일 내에서 ADAC에 이어 두 번째로 규모가 큰 자동차서비스클럽이다.
AvD는 1899년에 설립됐으니 올해 꼭 105주년이 된다. 지난 99년에는 창립 100주년 기념으로 베를린에서 올드타이머 전시회를 성대하게 치렀으며, 1999년 8월6일부터 3일간 뉘르부르그링에서 올드타이머 그랑프리를 개최했다. 이 행사는 1972년부터 해마다 AvD가 열고 있는데, 1999년에는 18개국에서 무려 500여명의 올드타이머 운전자들이 참석해 성황을 이뤘다. 참가국은 아무래도 자동차역사가 오래된 북미와 유럽국가가 대부분이고 아시아에서는 유일하게 일본이 참가했다.
그렇다면 올드타이머 그랑프리란 무엇일까. 사실 우리에겐 올드타이머란 단어조차 낯설다. 명문화돼 있지는 않으나 통상 올드타이머란 25년 혹은 30년 이상된 자동차를 말한다. 이 기준으로 보면 우리나라엔 진정 올드타이머라고 부를 수 있는 고유의 자동차 모델은 존재하지 않는다. 혹시 50년대 이전이나 60년대에 드럼통을 두드려 펴서 만들었다던 버스나 지프형 승용차가 어딘가에 숨어 있을 지는 몰라도 말이다. 그런데 올드모델 혹은 올드카라 하지 않고 왜 하필 올드타이머라고 부를까.
모든 그랑프리가 그러하듯 올드타이머 그랑프리 역시 첫날은 타임트레이닝부터 시작한다. 레이스는 시대별 혹은 모델별로 나눈 카테고리 안에서 실시되는데, 순위를 결정하는 레이스와 데몬스트레이션 레이스로 나뉜다. 순위 결정 레이스는 아무래도 그 옛날 각종 경주대회에 참가했던 경력을 갖고 있는 레이싱카들이 참가하고, 일반 모델들은 시대별 혹은 모델별로 데모레이스에 주로 나온다.
1962~1965년 만들어진 투어링카들만 참가할 수 있는 FIA 챌린지 투어링카 유럽 챔피언전을 필두로 이틀에 걸쳐 총 10개의 레이스, 크라이슬러와 페라리 등의 퍼레이드, 각종 올드타이머들이 데모레이스를 펼침으로써 유럽 최고의 올드타이머 대잔치임을 확인한다.
특히 1923년형 밀러(Miller) G.P.122부터 1939년형 라곤다 르망(Lagonda Le Man V12)까지 출전한 레이스는 프랑스의 유명한 장거리 레이스인 르망 레이스를 본떠 출발하며 스릴을 더한다. 르망레이스 출발이란 출발신호가 떨어지면 레이서들이 각기 자기 차로 뛰어가서 시동을 건 다음 출발하는 것인데, 르망레이스와는 달리 최소 60년이 넘은 고령의 차들을 배려해 10바퀴만 주행한다.
그렇다고 결코 얕볼 수 없는 게 40.56km라는 만만치 않은 거리를 평균시속 118km로 달린다. 물론 뉘르부르그 서킷링과는 다른 조건이겠지만 우리나라 용인에서 벌어진다는 포뮬러 비슷한 경기의 평균속도가 이와 엇비슷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철저하게 정비를 마치고 출전했으련만, 정작 출발신호가 떨어지자 시동이 걸리지 않아 끝내 출발하지 못한 아쉬운 올드카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거뜬하게 완주한다.
1971년까지 만들어졌던 각종 스포츠 프로토타입들이 벌이는 레이스도 빼놓을 수 없다. 포르쉐, 알파로메오, 페라리, BMW, 로라, 쉐브론 등 명가의 명품들이 벌이는 레이스는 항상 볼거리다. 지난해는 영국 출신의 조나단 베이커가 알파로메오 T33 TT로 2연패했다.
이 프로토타입 레이싱카들의 평균속도는 147.8km/h다. 얼마 전까지 이 곳 뉘르부르그링에서 벌어졌던 F1 경기 때 슈마허나 헤키넨이 세운 평균속도 190km/h에 비하면 \'애개 겨우?\' 라고 반문할 지 모르지만 최소한 25년 이전에 제작된 것이라는 점과 출전선수들이 평범한 일반 아마추어라는 것 그리고 90도 이상 꺾어지는 굴곡이 다섯 군데 이상 되는 뉘르부르그링의 난코스를 생각한다면 결코 만만한 속도가 아니다.
99년 처음으로 실시된 포멜2와 포멜5000은 출전자격 제작년도를 분명히 1971년 이전으로 못박았음에도 외형이나 디자인 그리고 성능에 이르기까지 현재 진행되고 있는 F2나 F3의 머신과 구별할 수 없다. 포멜2 머신은 엔진 배기량이 2,000cc 이하지만 포멜5000은 배기량이 5,000cc급이어서 큰 심장에서 쏟아지는 웅장한 출발음이 압권이다.
지난해 레이스에서 함부르크의 슈톱 아드리안이 3,900cc짜리 엔진을 탑재한 팔리서(Palliser WHD2)로 맥라렌, 로터스 등 5,000cc의 대형 엔진을 장착한 쟁쟁한 후보들을 물리치고 우승함으로써 역시 포멜경기에서는 엔진 배기량이 3,000cc 정도가 좋다는 걸 다시 한 번 입증했다. 스위스에서 출전한 뮐러 피터(Miller Peter)는 요란하게
포즈를 취하는 등 기세등등했으나 이내 리타이어하고 말았다.
75주년 기념 크라이슬러 퍼레이드도 미국산 자동차, 특히 크라이슬러차가 드문 독일에서는 눈요기감이다. 가족들과 함께 동승해 서킷링을 달리는 모습은 참가자는 물론이고 관중도 함께 드라이빙의 즐거움을 느끼게 해준다.
이 행사에서 빠질 수 없는 게 올드타이머 경매다. 행사가 열리는 토요일 오후 6시부터 경매가 시작되는데, 지난해 최고의 관심은 요르단의 왕인 후세인이 내놓은 1953년형 메르세데스 벤츠 300S였다. 적게는 1만마르크짜리 영국의 미니에서부터 수백만마르크를 호가하는 올드타이머들이 새로운 주인을 찾아 떠나간다.
그런데 이 처럼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는 모델들이 실제로 질주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과거로 되돌아간 착각과 더불어 부러움이 솟아난다. 자동차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고 자부하던 필자도 올드타이머 그랑프리를 보면 심한 패배감을 느낀다. Alco, Knox, Delage, Abbott-Detroit, Sunbeam Brixia-Z 등 생전 듣도 보도 못한 모델들이 이렇게 많을 줄이야.
자꾸 짧다고만 생각되는 자동차역사에 이 광대한 저변의 끝은 과연 어디일까. 1907년산 차가 아직도 쌩쌩 달린다. 1907년, 우리는 그 때 무엇을 했더라. 헤이그에서 이 준 열사가 자결하고 고종황제가 폐위당하고 한국군이 해산되고‥.
그 해 8월의 뉘르부르그에선 올드카가 달린 게 아니라 지난 역사와 시간이 내 앞을 스쳐 지나 달렸다. 그래서 올드카가 아니라 올드타이머인가. 결국 자동차의 역사와 전통과 문화는 이렇게 시간과 더불어 마니아들의 노력으로 이뤄지는구나 하는 아주 자명한 깨달음을 확인하면서. 그리고 그 다음에 떠오르는 화두. \'그럼 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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