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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승기

두 얼굴의 슈퍼세단 - 재규어 XFR

재규어 XF의 고성능 버전 XFR을 만났다. 경쟁 차종을 꼽아보라면 BMW M5, 벤츠 E63 AMG 등이 있겠다. 어지간한 스포츠카보다 빠르다는 고성능 스포츠세단 중에서도 가공할만한 출력을 내뿜는 상위등급에 포함된 XFR은 세단의 탈을 쓴 슈퍼카라 해도 손색이 없다. 두 얼굴의 슈퍼세단, XFR을 느껴보자.

글, 편집 / 김정균 기자 (메가오토)
사진 / 박환용 기자 (메가오토)


잠에서 깨어난 질주본능
오른발에 스트레스 없는 조용하고 안락한 대배기량 세단의 감각과 적당히 단단하고 세련된 하체를 느끼며, 수준 높은 오디오 시스템으로 잔잔한 음악을 즐기면서 복잡한 도심 속 느긋한 주행을 하고 있다. 음... 이런 분위기로는 도저히 고성능 모델이란 생각이 들지 않는다. 보통 고성능 스포츠세단이라 하면 일반적인 주행에서도 날카롭고 하드한 감각이 조금은 느껴지게 마련인데, 이건 그냥 안락한 프리미엄 세단일 뿐.. 대체 뒤에 R자는 왜 붙어 있는 걸까?

잔뜩 기대했던 설렘이 그렇게 사라지면서 피곤에 지친 몸을 시트에 푹 파묻으니 졸음까지 밀려오기 시작한다. 그러다 복잡한 도심을 벗어나 한산한 구간에 접어들자 이제 좀 달려봐야겠다는 생각에 눈이 반쯤 감긴 상태에서 하품을 내뱉으며 무심코 가속페달을 꾹 밟았다.

\'아~흠... 잘~ 나가네... 역시 배기량이 깡패인... 어...?!!\'


슈퍼차저의 음색과 심금을 울리는 배기음이 아득히 들려오면서 계기판의 바늘이 미친 듯이 치솟고 있다. 단순한 대배기량 세단의 가속감이 아님을 깨달을 찰나 순식간에 200km/h를 향해가고 있는 상황, 순간 반쯤 감겼던 눈이 휘둥그레지며 입이 쩍 벌어진다.

\'너... 미쳤구나...?\' 라고 속으로 중얼거리곤 정신을 바짝 차린다. 동승석의 기자님은 몸만 시트에 붙어있지 영혼은 이미 안드로메다로 날아간 듯 헤벌쭉 웃고만 있다. 200km/h를 넘어선 후에도 거침없이 치솟는 속도, 그냥 D모드인데 이런 상황이 벌어졌다. 기자가 알기론 250km/h에서 리미트가 걸려 있으니 오른발을 떼지 않고 계속 내달려 본다.


\'헉... 260km/h... 270km/h...\' 흔히들 메타를 꺾는다고 표현하는데, 속도계의 바늘이 확인 가능한 270km/h에 고정되고 계속 뻗어나간다. 이따금 그 이상의 속도도 경험해봤지만 대체 몇 km/h인지 확인이 불가한 상황에 덜컥 겁이 난 기자는 결국 XFR에게 두 손 들고 속도를 줄여 투항한다. 100km/h까지 감속했더니 평소의 30km/h정도로 체감 속도가 완전 느려지고, 마치 시공간을 뚫고 지나온 듯 멍해진 상태가 되어 결국 도로변에 멈춰 섰다. 조수석의 기자님은 아직도 넋이 나간 상태로 굳어있다. 이런 사태가 벌어진 이유는 100~200km/h 가속이 어지간한 스포츠세단의 0~100km/h 가속시간에 필적할 정도인데다 200km/h를 넘어서도 그야말로 거침없이 치솟았기 때문이다.

차에서 내려 XFR을 지긋이 바라보며 담배를 꺼내 물고 불을 붙이는데 라이터를 잡은 손이 파르르 떨린다. 날씨가 추워서인지 가슴이 떨려서인지 모르지만, 마음을 추스르지 않고서는 다시 운전석에 앉을 자신이 없다. 그렇게 한참을 우두커니 서서 매서운 겨울바람 속에 담배 연기를 내쉬며 두 눈을 지그시 감아본다.


아트웨어
일단 녀석의 첫인상은 전통과 미래가 공존하는 클래식하면서도 세련된 외관을 뽐낸다. 시승차의 색상은 펄이 풍부하게 가미된 진한 다크블루, 흔하지 않으면서 XFR의 이미지와 잘 어울리고 밤에는 완연한 블랙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특히나 도장 품질이 아주 우수하다는 것이 인상적이다. 얼핏 보면 일반적인 XF와 비슷하지만 가만 살펴보면 R의 차이점이 곳곳에 스며들어있다.

전면에선 그물망 형태의 크롬 라디에이터그릴과 그 안에 박힌 재규어의 얼굴이 클래식함을 나타내고, 가운데 동그란 눈망울이 살아있는 와이드한 헤드램프가 균형을 맞춘다. 일반 XF와 다른 점은 고성능을 위해 원활한 공기 흡입과 열 분출을 위한 디테일들이 가미된 것. 앞 범퍼 양쪽의 커다란 공기흡입구는 크롬 테두리로 강조되어 R의 강인한 인상을 배가시켜주며, 본닛과 앞 펜더엔 엔진룸의 열을 내뿜는 에어홀이 뚫려있어 기능성을 살리면서도 고성능임을 나타내는 디테일로 표현되고 있다.


측면에선 XF 특유의 늘씬한 쿠페 형상을 나타내는 C필러 라인이 돋보이면서 R의 보다 낮은 지상고와 맞물려 휠 하우스를 꽉 채운 거대한 7스포크 20인치 경량 휠이 스포티한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킨다. 윈도우프레임에 사용된 크롬 라인은 클래식함이 살아있는 재규어의 디자인과 잘 어울리는 모습.


후면에서 먼저 눈에 띄는 부분은 각각 얄쌍한 두 개의 구멍이 뚫린 듀얼머플러가 살짝 튀어나와 있는 것. 보면 볼수록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매력 있다. 여기서 울려 퍼지는 XFR의 배기음은 기자가 들어온 수많은 음색 중에서도 단연 최고.

두툼한 범퍼가 강인함을 연출하고, 리어램프를 연결하는 크롬 라인과 뛰어오르는 재규어 엠블럼이 조화를 이룬다. 트렁크리드의 얇은 스포일러는 애교 있어 보일 지경. 초고속 영역의 안정감을 위해선 좀 더 키워도 좋을 것 같지만 XFR의 디자인 컨셉은 아마도 튀지 않는 고성능 디테일에 초점이 맞춰진 것 같다.

그밖에 XFR은 슈퍼차저 엔진임을 외관에서도 나타내고 있는데, 본닛과 앞 펜더의 에어홀, 그리고 휠에도 ‘SUPERCHARGED’ 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살아 숨쉬는 내부
이제는 익숙해져가지만 현행 XF가 등장했을 당시의 실내 인테리어는 파격적이었다. 더군다나 고지식한 영국 차의 이미지였던 재규어의 실내가 첨단의 이미지와 기발한 아이디어로 탈바꿈되었으니 그 변화의 폭은 상당했다.

그러한 XF의 디자인을 유지한 채 R에서는 은색 카본 재질 느낌의 패널이 폭넓게 사용되었고 가죽과 메탈, 블랙 우드 등의 소재가 조합되어 있으며 조립 품질도 프리미엄급의 완성도 높은 단단함이 배어있다. 다만 시승차의 인테리어 컬러는 시트를 비롯해 전체적으로 심심한 베이지색 계열이 적용되어 디자인의 매력을 제대로 발산하지 못하는 것 같아 아쉬웠다.


실제론 투톤 컬러 시트를 비롯해 보다 멋진 인테리어 색상들도 마련되어 있으며, XFR에겐 그 편이 훨씬 어울리지 않을까 싶다.


이미 그간의 XF를 통해 잘 알려진 아이디어(?) 장비들은 다시 봐도 신선한 느낌이다. 시동을 걸면 솟아오르는 기어변속 다이얼, 공조장치의 작동 유무에 따라 빙글 돌아서 모습을 드러내는 송풍구, 글로브박스의 오픈이나 조명등 조작이 손가락을 대기만 하면 되는 터치식이라는 것 등등, 디자인도 그렇지만 이러한 장비들을 조작하고 있으면 확실히 차가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탑승 후 도어를 닫은 다음 스마트키를 좌측 하단에 꽂아 넣으면 시동버튼의 붉은 조명이 마치 심장처럼 두근두근 깜빡이며 눌러보라고 유혹한다. 버튼을 누르면 잠자던 슈퍼차저 심장이 고요하게 깨어나고, 스티어링휠이 제자리를 잡으면서 변속 다이얼은 솟아오르고 송풍구가 회전하는 등, 마치 잠자던 생물을 깨운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흥미로운 퍼포먼스를 연출한다.


차원이 다른 고성능
정확하게 5000cc 배기량인 신형 V8 엔진에 슈퍼차저가 더해져 발휘되는 가공할 파워는 최고출력 510마력(6000rpm), 최대토크 63.8kg.m(2500~5500rpm)에 달한다. 이 무서운 심장을 후륜구동 세단의 몸에 이식시켰으니 과연 버텨낼 수나 있을지 의심스럽기도 한데, 그것을 해소하기 위해 재규어는 XFR에게 할 수 있는 온갖 기술을 모두 적용시켰다.

기본적으로 높은 차체 강성과 단단하고 세련된 하체가 기반이 되며, 재규어 최초로 각 바퀴에 전달되는 토크 비율을 전자동으로 제어하여 접지력과 가속력을 향상시켜주는 액티브 디퍼렌셜 컨트롤과, 초당 100회에 걸쳐 차체 움직임을 분석해 승차감과 핸들링을 향상시켜주는 어댑티브 다이내믹스 시스템을 도입했다. 그 외에도 고성능 R 브레이크 시스템, 코너링 브레이크 컨트롤 시스템, 급제동시 브레이크 압력을 높여주는 EBA, 트랙 DSC 등의 안전장치들이 저마다 제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그로 인해 고출력 후륜구동임에도 충분한 안정감을 느낄 수 있으며, 마음먹기에 따라 리어를 날려대며 스릴 넘치는 주행을 즐길 수도 있다. 결국 300마력 전후의 스포츠세단들이 불안감을 느끼는 한계의 영역에서도 XFR은 여유롭고 든든하지만, 운전자의 스킬이 풍부하다면 언제든 그 이상에 도전하며 한 차원 높은 영역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배틀 아닌 배틀
상암 월드컵 경기장 부근, 도로의 흐름에 맞춰 얌전히 달리다가 터널 안으로 접어들자 테너 C톤으로 조율된 감동적인 배기음을 듣기 위해 가속페달을 한 번 깊게 밟았다 뗀다. 아, 귀가 호강하는 이 즐거운 화음. 하지만 그것은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린 순간이었다. XFR의 배기음이 터널 안에 짧게 울려 퍼진 이후 갑자기 저 뒤에서 우렁찬 소리가 엄습해온다. 곧 이어 우측 사이드미러에 하얀 빛을 내뿜는 시커먼 차체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굉음을 내뿜으며 옆을 지나친 후에 저 만치 앞으로 치고나간다. XFR의 두 눈이 번뜩이며 벤츠의 63 AMG임을 감지해낸다. 그것 또한 잠자는 재규어의 코털을 건드린 순간이었다.

아마 AMG는 이쪽이 XF인지 XFR인지 잘 모를 수 있다. 일단 신호에 걸려 정지한 AMG의 뒤에 붙어 선 후 변속 다이얼을 S모드로 돌렸다. 신호 이후엔 차가 없는 뻥 뚫린 구간, 역시나 예상대로 녹색등이 점멸된 순간 풀 스로틀로 치고나가는 AMG, XFR도 리어휠을 살짝 미끄러트린 후에 미친 듯이 내달려나간다.


그런데... AMG의 뒤를 무섭게 따라붙는 XFR, 여느 차라면 멀어져가는 AMG를 바라봐야 했겠지만 오히려 속도가 높아질수록 XFR의 가속페달엔 여유가 남기 시작했고,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AMG는 속도를 줄이지 못하고 둥근 인터체인지를 오버스피드로 진입했다. 리어가 흐트러지며 뒤뚱거리는 AMG의 뒤를 따라 돌아나가는 XFR, 차체를 제어하기 위해 온 신경을 집중한 AMG의 거동을 주시하면서 한결 여유로운 움직임으로 물 흐르듯 인터체인지를 흘러내려간 XFR은 흐뭇한 미소를 안겨준다.

강변북로에 접어들어 여유롭게 달리는 차량들 사이로 차가운 밤공기 속에 멋들어진 배기음을 퍼트리는 두 개의 빛이 교차되며 쉴 틈 없이 뻗어나간다. 애초에 새벽시간이 아닌지라 AMG를 위험하게 추월할 마음이 없다. 다만 뒤따라 함께 달리며 AMG의 성능과 비교 가늠해볼 수 있는 기회, 그렇게 무작정 뒤를 따라 달리던 와중에 어느덧 양재 IC까지 접어들어 고속도로를 향해가는 AMG와 헤어지곤 다시 도심으로 접어든다. 밤 10시를 즈음해서 벌어진 신나는 주행에 걸린 시간은 상암동 월드컵 터널부터 양재IC까지 17분.


에필로그
XFR의 짜릿한 느낌을 되새기며 정신없이 시승기를 작성하다보니 어느덧 배틀기 아닌 배틀기까지 써내려가게 된 점에 대해서는 독자 여러분들께 양해를 구한다. 여느 스포츠카나 슈퍼카보다도 인상 깊었던 XFR이기에 틀에 박힌 형식을 벗어날 수밖에 없었다.

XFR은 완벽한 두 얼굴을 가졌다. 느긋한 주행을 하면 과장 조금 보태 렉서스와 헷갈릴 정도로 편안하고 정숙한 프리미엄 세단의 감각을 보여주다가도, 마음먹고 달리면 하드코어한 슈퍼카 부럽지 않을 정도의 시원한 쾌감을 선사해주기 때문이다. 일례로, 시승기 사진 어딘가에 얼핏 보이는 파나메라 4S를 타고 XFR과 함께 80km/h로 나란히 달리다가 동시에 풀 스로틀 한 결과는 구렁이 담 넘어가듯 앞서가는 XFR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또한, BMW 신형 F02 760Li보다 0-200km/h 가속이 더 빠르다.


슈퍼세단, 그 이후...
두 얼굴의 슈퍼세단, 재규어 기술의 집약체인 XFR은 벤츠 AMG나 BMW M과는 뭔가 절묘하게 다르면서도 흡족한 감성을 보여주기 때문에 이런 부류의 하이퍼포먼스를 선호하는 오너라면 독일차의 흔한(?) 감성에서 벗어나 XFR을 통해 한 번쯤 일탈을 꿈꿔보는 것도 매우 흥미로운 시도가 될 것이다.

기자 개인적으론 세단 중에서 한 대만 꼽으라면 지금부터는 XFR이다. 너무 과도하지도, 전혀 부족하지도 않으니까. 그리고 XFR의 시승 이후 엄청난 후유증을 앓고 있다. 300마력 전후의 스포츠세단들이 답답하게 느껴지는 착시현상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XFR은 세단이지 말았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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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가오토] 재규어 XFR 프리미엄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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