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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승기

지울 수 없는 강렬한 기억 - 미쓰비시 랜서에볼루션 MR


언젠가 꼭 한 번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 만나기로 약속하면 가슴이 설레는 사람, 만나서 함께하면 너무나 즐거운 사람, 헤어지면 돌아서자마자 다시 보고 싶은 사람, 오랫동안 못 보면 사무치게 그리운 사람...

열렬히 사랑했던 첫사랑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고, 기자에게 랜서 에볼루션은 그런 존재다. 덧없이 스쳐가는 수많은 차량들 가운데 머릿속이 아니라 가슴속에 남는, 정말 몇 안 되는 그런 녀석 중 하나인 것 같다.

글, 편집 / 김정균 팀장 (메가오토 컨텐츠팀) @motorjournalist
사진 / 박환용 기자 (메가오토 컨텐츠팀)


2008년 정식으로 한국 땅을 밟았던 미쓰비시 랜서 에볼루션 X (이하 애칭인 ‘란에보’로 통일)가 올해 MR이란 배지를 붙이고 상품성 업그레이드와 가격 인하를 통해 더욱 매력적으로 거듭나며 출시되었을 때, 녀석을 다시 만난다는 기대감으로 오랜만에 예전 그때처럼 설레는 기분을 즐겼다.

D-Day가 되어 시승차로 나타난 녀석은 깔끔한 흰색. 기자의 눈에는 란에보의 색상 중 가장 예뻐 보인다. 여담을 덧붙이자면 미쓰비시 시승차들은 언제나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한 상태여서 담당자의 남다른 정성이 느껴지곤 한다.


출발 전 순백의 란에보 주위를 한 바퀴 돌며 살펴본다. 상징과도 같은 한쪽으로 치우친 번호판은 내년에 중앙으로 옮겨질 예정이란다. 큼직한 날개가 얹힌 다부진 엉덩이에는 새로 추가된 붉은색 MR 배지가 선명하고, 기존 모델 대비 디자인의 변화라면 굵직한 사이드스커트가 달린 것 정도. 아주 작은 변화지만 예전보다 스포티하고 강인한 머신의 분위기를 풍겨내는 모습에 흐뭇한 미소를 짓게 된다.


차갑고 단단한 스포츠카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실내로 들어가 레카로 버킷시트에 몸을 맡기면 낮은 포지션으로 인해 묘한 긴장감이 감돈다. 기존 모델 대비 눈에 보이는 변화는 계기판 가운데 단색이었던 정보 패널이 세련된 컬러로 바뀐 것 정도지만, MR 버전으로 오면서 소음 차단 글래스, 웰컴&커밍홈 라이트, 컴포트 워셔 등의 기능이 추가되어 내실을 기했다.


참고로, 한국형 MR 버전은 일본에서 가장 최고급형인 GSR 프리미엄 모델에 장비를 추가해서 구성되었다고 한다. 현지 판매가격도 한화로 5천만 원이 넘어간다고 하니, 6천 이하로 다운되며 책정된 가격은 높아진 상품성과 함께 구미가 당기는 요소.


이제 궁극의 코너링 머신과 함께 달려볼 차례. 녀석의 심장은 가변 밸브 타이밍 기술이 접목되어 MIVEC이라 불리는 2리터 터보엔진이다. 배기량은 작지만 트윈스크롤 터보차저 덕분에 최고출력 295마력, 최대토크 41.5kg.m라는 뛰어난 출력이 트윈클러치 변속 시스템 TC-SST와 맞물려 최적의 반응을 이끌어내며, 각종 자세제어장치를 통합한 S-AWD 시스템이 네 바퀴를 조율하여 신선한 경험을 선사해준다.

시승 장소는 당연히 굽이진 와인딩 코스로 잡았다. 란에보를 타고 쭉 뻗은 직선 도로만 달리는 그런 짓은 엄청난 죄악이니까. 란에보의 신들린 코너링 실력을 경험했던 예전 그 장소로 다시 향하면서, 이번엔 더 빠르게 내달려보리라 마음을 다잡고 서둘러 가속페달을 밟아댄다.


역시나, 차체는 분명 세단인데 분위기는 완전한 스포츠카다. 스포츠세단이 아니라 진정한 스포츠카의 감각으로 모든 것이 단단하고 치밀하며 폭발적인, 그래서 절로 흥이 나는 그런 성격을 가졌다. 무엇보다 빌스테인(Bilstein) 쇽업쇼바와 아이박(Eibach) 코일스프링이 채용된 제대로 단단하고 탄탄한 하체가 압권이며, 뒤에서 귓가를 자극하는 시원한 배기음이 분위기를 한껏 드높인다.


흥겨운 마음으로 한걸음에 도착한 와인딩 코스 초입에 잠시 멈춰서 마음을 추스른다. 레카로 버킷시트는 몸을 잘 잡아주고 있어 안심이지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체형에 따라 시트를 뒤로 밀면 틸트만 되고 텔레스코픽이 지원되지 않는 스티어링휠 때문에 올바른 자세보다 팔을 좀 더 뻗어야 한다는 것. 그로 인해 다리가 길어서 불편하다는 망언을 떠들게 된다.

수동변속기보다 빠르게 빛의 속도로 변속되는 트윈클러치의 변속모드는 일단 스포츠로 세팅, 신나게 산을 타고 오르내릴 준비를 마친 후에 앞서 지나간 차량들이 충분히 멀어질 즈음까지 한참을 기다렸다가 드디어 가속페달을 끝까지 밟아 채찍질을 시작한다. 네 바퀴 모두의 구동력으로 힘차게 노면을 박차며 화살처럼 튀어나가는 란에보의 초반 가속력은 시트에 몸을 파묻기에 부족함이 없다.


온 신경을 집중하며 굽이진 코너를 공략해 나가기 시작하는데, 란에보는 처음부터 일반적인 차량들과 거동 자체가 다르다. 어지간히 빠른 속도로 스티어링휠을 바쁘게 잡아 돌려도 타이어 끌리는 소리조차 쉽게 들리지 않으니 일단 심리적인 안정감이 상당할 수밖에 없고, 때문에 초보자라도 안심하며 다른 차량으론 엄두도 내지 못했던 꽤나 빠른 코너링을 손쉽게 시도할 수 있다.

단단한 차체 강성을 기본으로 S-AWD시스템이 상황에 맞게 네 바퀴가 최적의 성능을 낼 수 있도록 치밀하게 제어해주니 어떤 코스에서도 마치 레일 위에 고정되어 달리는 것처럼 뉴트럴한 움직임을 펼쳐낸다.


내친 김에 독이 든 성배와도 같은 슈퍼스포츠 모드로 전환하고 눈에 불을 켠다. 심박 수가 상승함과 동시에 가속페달을 짓누르니 타코미터의 바늘이 더 높게 솟구치며 회전수를 끌어올리고, 코너 진입과 탈출에 맞춰 패들시프트를 까딱거리면 순간적으로 반응하며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원하는 타이밍을 잡아낸다.

굽이진 코스를 날아가듯 미친 듯이 내달리는 란에보. 갈수록 신나서 흥에 겨운 나머지 그만 무모하리만큼 높은 속도로 코너에 진입해 타이어가 끌리는 소리를 듣고는 아차 싶다가도, 스티어링휠에서 손을 떼지 않는 이상 아주 약간의 보정만으로 원하는 라인을 벗어나지 않으며 오른발을 부추기는 녀석.

슈퍼스포츠 모드에서 더욱 우렁찬 음색으로 신음하는 엔진음과 배기음은 기분 좋은 하모니를 이루며 온 몸을 자극해대고, 가공할 속도로 코너를 돌아나가는 짜릿함과 더불어 오르가즘의 절정을 이끌어낸다. 그런 와중에도 급할 땐 답력이 적당히 무거운 브렘보 브레이크가 과분하리만큼 출중한 능력을 발휘하며 순식간에 멈춰주니 크게 긴장할 필요도 없다.


에필로그
국내에서 랜서 에볼루션의 경쟁 모델은 없다. 단지 가격만 비슷하다고 해서 여타 스포츠세단이나 쿠페들이 정말로 스포츠카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란에보는 진짜 스포츠카다. 그것도 꽤나 하드코어한 성격을 가진, 하지만 누구나 손쉽게 즐길 수 있는 그런 머신인 것이다.

기대 이상으로 짜릿하고 즐거운 드라이빙을 펼친 란에보와 또 다시 헤어질 시간이 찾아왔다. 오래전 첫 만남 때는 거부할 수 없는 유혹에 푹 빠져버려 떠나보내기가 너무나 아쉬웠던 기억이 나는데, 이번에는 반대로 별다른 미련 없이 쿨하게 작별할 수 있었다. 란에보가 선사해준 특별한 퍼포먼스와 주행 감성은 시간이 흘러도 쉽게 지울 수 없는 강렬한 기억이 되어 생생하게 남아 있을 테니까.
{del}




* 프리미엄 갤러리 업데이트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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