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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승기

전통과 변화의 경계선 - 메르세데스 벤츠 뉴 E클래스


메르세데스-벤츠 E클래스의 역사는 194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후 60여 년간 세계적으로 1200만대 이상 판매되며 최고의 프리미엄 중형 세단으로서 그 가치를 입증해왔다. 현행 모델은 2009년 제네바모터쇼를 통해 첫 선을 보이고 7년 만에 풀 모델 체인지 되어 출시된 9세대로서, 국내에서도 가솔린, 디젤, AMG 엔진이 얹히는 세단, 쿠페, 카브리올레 등의 매우 다양한 라인업이 시판되고 있다.

글, 편집 / 김정균 기자 (메가오토) @motorjournalist
사진 / 박환용 기자 (메가오토)


기자는 최근 남모를 우울증을 앓고 있다. 계속되는 업무 스트레스와 이런 저런 고민들, 그리고 만성 피로에 맥을 못 추고 있는데다가 시승기에 종종 적혀있듯 가속페달을 밟는 오른발에 너무 예민하게 힘을 주다보니 무릎 관절염이 생겨서 몸과 마음 모두 여기저기 잔고장이 발생한 자동차처럼 정상이 아닌 상태.

이쯤 되면 대책을 마련해 고쳐줘야 하겠지만 그럴 시간도 여유도 없는지라 방치된 채로 계속 달려가고 있으니, 이러다 어느 날 갑자기 멈춰서는 건 아닌지 걱정도 된다. 역시 사람은 마음 편하고 건강한 것이 최고다. 그러려고 사는 것인데 왜 이러고 사는지도 모르겠다. 인생을 살면서 굴곡이 있게 마련이지만 하루빨리 지금의 슬럼프를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기자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사랑스런 자동차들과 함께 달리는 그 순간에도 영 기분이 나지 않는다. 못마땅한 단점이라도 발견되면 시승 내내 온갖 투덜거림을 무한 반복하는 욕쟁이 기자가 되어버리기도. 하지만 이따금 훌륭한 내공을 가진 녀석들을 만나면 그나마 우울했던 기분이 조금 풀어지곤 하는데, 이번 시승기의 주인공인 E클래스가 그런 경우다. 시승차는 E350 4MATIC 아방가르드 모델로서, 일단 메이커와 가격대를 보면 그만큼의 값어치는 하리라 예상되며 실제로도 역시나 흡족함을 안겨준 녀석이다. 주먹을 부르는 내비게이션만 제외한다면.


외관부터 살펴보면 최근 다시 각을 잡아가고 있는 메르세데스의 디자인 특징이 잘 나타난다. 이전세대는 곡선미가 강조된 우아한 여성스러움이 묻어나왔다면, 현 세대는 직선적이고 과감한 라인들을 사용해 남성적인 분위기를 풍기며 강인함과 스포티함을 배가시켰다.

디테일도 전체적인 라인과 조화를 이루는 직선적인 형태로 다듬어졌다. 앞모습은 이목구비가 선명해진 느낌으로 특유의 라디에이터그릴과 보닛의 삼각별 엠블럼은 그대로지만 4등분된 헤드램프는 더 이상 원형이 아닌 날카롭게 각진 모습이며 앞 범퍼 형상은 AMG모델 부럽지 않은 스포티함을 물씬 자아낸다.


측면은 날카로운 직선의 캐릭터라인이 중심을 잡아주고 리어 휠 아치를 따라 만들어진 또 다른 라인이 겹쳐 흘러간다. 이는 최근의 벤츠 신형 모델들에게서 보이는 공통된 디자인 요소. 루프라인은 C필러를 길게 눕혀 쿠페스러움을 강조하는 최근의 여타 세단들과 달리 각을 세워 다소 보수적인 느낌과 함께 튼실한 이미지를 강조했다. 후면은 깔끔한 분위기로 리어램프와 듀얼 머플러 등이 무난한 디테일로 정돈된 모습.

현행 E클래스는 전체적으로 각지게 깎아놓은 조각상 같은 느낌인데, 근래 너무 통통하고 비대해 보이는 세단들이 범람하는 시점에서 덩치가 커보이진 않지만 존재감이 상당하면서 날렵함과 스포티함도 은근히 묻어나오는 E클래스의 외관은 분명 프리미엄 중형 세단으로서 메르세데스만의 차별화된 가치를 지녔다.


실내 디자인 역시 직선으로 가득 채워진 모습. 이 역시 최근의 벤츠 신형 모델들에게서 보이는 공통점으로서 디자인은 예전과 달라졌지만 각종 조작부들은 여전히 기존의 방식을 유지하고 있다. 예를 들어 풋 파킹 브레이크와 이를 해제하는 손잡이, 대부분의 차종들보다 조금 아래쪽에 달린 방향지시등 레버, 도어에 위치한 전동 메모리시트 조작부, 센터페시아의 배열 등이 너무나 친숙하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현행 E클래스의 실내 재질 등 인테리어 품질에 대해서 말들이 있다는 것인데, 기자의 판단으론 딱히 흠잡을 만한 정도는 아니라고 본다. 최근의 추세가 워낙 미래지향적인 실내 디자인들이 많아서 상대적으로 클래식함이 묻어나는 E클래스이기 때문에 더 그렇게 느껴질 수도 있다. 물론 플라스틱 재질이 많이 들어가긴 해서 경쟁 모델들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실망할 수도 있지만, 벤츠는 이를 훌륭한 조립품질과 탄탄한 구성, 특유의 분위기로 만회하고 있다.


아날로그시계가 포함된 벤츠 세단 특유의 계기판에서 유독 눈에 띄는 부분은 속도계 중앙 정보 패널에 자그마한 커피 잔 모양이 항상 점등되어 있다는 것. 요게 무엇인가 하면 운전자가 졸거나 주의력이 저하됨을 감지하면 경고를 해주는 주의 어시스트 기능이라고 한다. 시승 중 일부러 졸음운전을 시도할 수는 없었지만 이러한 장비는 안전에 대한 또 하나의 해법이 아닌가 싶다.

기어변속레버에 대해서는 호불호가 갈리겠으나 익숙해지면 조작성은 편리하다. 센터 콘솔이 길어진 것을 빼면 기어변속레버 위치를 옮겼다고 해서 공간 효율성이 그다지 좋아진 것 같진 않지만 분명 깔끔해 보이는 효과는 있다. 뒷좌석은 넉넉함과 편안함, 그리고 적당한 단단함에서 불만이 나오지 않는다. 에어컨 송풍구는 B필러와 중앙부 모두 제공되어 쾌적함을 자랑한다. 트렁크 공간은 동급에서 우수한 편으로 외관에서 보이는 것과 달리 꽤나 넓다.


주행으로 넘어가기 전에 초반에 언급했던 주먹을 부르는 네비게이션 이야기는 꼭 해야겠다. 도대체 왜, 어째서 이 좋은 차에 이런 쓰레기 같은 네비게이션이 장착되어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기자가 지금껏 시승기에 ‘쓰레기’라는 표현을 사용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는데, 국내 메르세데스-벤츠에 공통된 이 네비게이션에 대해서는 도저히 쓰레기 말고는 다른 단어가 떠오르질 않는다.

열악한 화질은 둘째 치고 터치스크린이 지원되지 않는 이유로 목적지를 검색하기 위해 딜레이가 엄청 심한 리모컨의 방향키와 확인 버튼을 눌러가며 자음과 모음 사이를 해쳐나가야 할 때의 그 답답함과 짜증스러움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게다가 목적지를 잘못 검색해서 나오지 않아 애써 힘들게 눌러놓은 명칭을 지우고 다시 그 짓을 해야 하는 경우가 생기면 정말 주먹에 불끈 힘이 들어가면서 리모컨을 던져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다.

물론 적응이 되면 목적지를 검색하는 동안 동승자에게 내려서 담배 한 대 피우고 있으라 하던지 화장실에 다녀오라는 등의 꼼수를 터득함으로서 무안함과 뻘쭘함을 달랠 수는 있겠으나, 정작 리모컨을 누르는 당사자는 이 모든 작업을 마치고 나면 화가 난 상태에서 출발하게 될 수도 있다. 결국 기자를 포함한 우리 팀원들이 내린 결론은 정신건강을 위해 이 네비게이션을 사용하지 말자는 것이었다.


네비게이션이 알려주는 목적지로 달리진 않았지만 벤츠에서 느껴지는 주행감성은 기자가 너무나 좋아하는 대목이다. 병 주고 약주는 분위기지만 어쩔 수 없다. 일각에선 신형인데 파워트레인이 그대로여서 메리트가 떨어진다는 의견들도 있으나 이는 모델 체인지와 파워트레인 체인지가 별개인 최근의 추세에 따른 정책일 뿐이고, 주행감성만큼은 여전히 군계일학이라 표현해도 될 만큼 흡족함을 선사해 준다.

물론 엔진 출력과 연비, 제로백 등의 수치적으로는 비슷한 배기량의 경쟁모델들 대비, 특히 BMW 대비 다소 뒤처지는 경향이 있으나 그건 BMW가 워낙 발 빠른 파워트레인 업그레이드로 앞서가고 있기 때문이지 벤츠가 모자란 것은 아니다. 아마도 향후 1~2년 사이에 현행 E클래스도 모두 짱짱한 신형 엔진으로 교체될 것이다. 아직 구입을 고려하고 있다면 시기를 그때쯤으로 잡아도 현명한 선택이 될 듯.


기존 그대로인 3.5리터 V6 엔진은 최고출력 272마력(6000rpm), 최대토크 35.7kg.m(2400rpm)를 발휘하며 7단 자동변속기와 맞물려서 그리 가볍지 않은 E클래스의 강도 높은 차체를 부드럽고 꾸준하게, 그리고 진중하지만 부족함 없이 힘있게 밀어붙인다.

관절염으로 고생하는 무릎을 추스르며 오른발에 힘을 주니 가속페달은 여유 있는 세팅으로 반 박자 느긋하게 반응하지만 원하는 만큼 치고나가는 감각은 그래도 수준급이다. 7단 자동변속기의 매끄러운 변속감이 더해져 속도가 붙을수록 더 속도가 붙어나가는 느낌이랄까.


그렇게 고속으로 쭉 넘어가면 굳이 시승차가 네 바퀴 굴림인 4MATIC이라서는 아니고 특유의 고속 안정성이 유달리 돋보인다. 세상에 200km/h 이상 달릴 수 있는 차는 이제 너무나 흔해졌지만 그 속도에서 든든한 안정감이 느껴지는 차는 아직도 그리 많지 않다. E클래스는 그 많지 않은 녀석들 중에서도 유달리 돋보이는 고속 안정감을 선사해준다. 그저 빠르게 달리는 것이 자동차의 전부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반드시 이런 부분도 감안하시길.


아이러니한 것은 이 녀석의 하체 세팅이 꽤나 부드러운 소프트한 감각이면서도 안정감이 상당하다는 것이다. 독일차가 추앙받는 가장 큰 이유는 이 리드미컬하고 판타스틱한 완성도 높은 하체 때문이라고 본다. E클래스가 노면의 요철을 흡수하는 모양새만 보면 물렁한 세단들과 크게 다를 바 없으나 딱 필요할 때 필요한 만큼의 단단함을 제공하는 이 마법의 하체를 표현하기엔 주행상황에 따라 자동으로 댐핑 감쇠력을 조절하는 다이렉트 컨트롤 서스펜션이란 장비가 장착되었다는 설명만으론 부족한 것 같다.

스티어링휠의 감각은 묵직하면서 약간의 유격은 있지만 반응이 좋다. 시승차는 4MATIC인데다가 원조 ESP가 잡아주는 E클래스의 타이어를 미끄러트리는 것은 불필요한 짓이어서 시도할 필요가 없었고, 그저 뉴트럴하고 진중하면서 안정감 넘치는 코너링 감각을 딱 한계 직전까지만 즐겼다. 4MATIC이라 해도 일상적인 주행에선 뉴트럴함이 주가 되는 FR 방식과의 차이는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 단지 한계점을 넘어가는 위급한 코너링이나 눈길 등에서 그 진가는 분명히 발휘될 것이다.


E클래스는 오로지 빠르게 달리기 위한 차가 아니라 프리미엄 세단의 훌륭한 주행감성과 안정감을 느끼며 혼자서든 동승자와 함께든 모든 영역의 속도에서 여유로움을 만끽하는 그런 차다. 일반 모델의 출력이 아쉽다면 고성능 AMG모델 또한 준비되어 있다.

벤츠의 시승기마다 언급하게 되어 지겹기도 하지만 브레이킹 능력은 두 말할 필요 없이 저속에서나 고속에서나 최상급. 기자가 언젠가 나이 들어 스포츠카에 대한 동경을 벗어나 벤츠의 세단을 흠모하게 된다면 그 이유는 오로지 탄탄한 강성과 하체, 브레이킹 감성 때문일 것이다.


에필로그
9세대까지 진화한 메르세데스-벤츠의 중심 E클래스는 예나 지금이나 그 이름에 어울리는 자태와 실력을 갖추고 있다. 클래식함을 잃지 않으면서도 결코 촌스럽거나 식상하지 않으며 보면 볼수록 매력이 넘치는 모습과 오랜 노하우를 바탕으로 한 특유의 진중한 주행감성은 여전히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를 자아낸다. 다른 메이커의 경쟁 모델들을 그다지 의식하지 않는 듯 정도를 걸어가고 있다는 느낌도 받게 된다.

현행 E클래스는 차후 예정된 신형 엔진으로의 업그레이드를 통해 다시금 일말의 논란들을 종식시키고 최강자의 자리를 지켜낼 가능성이 크다. 다만 앞으로는 강력해지는 경쟁자들에 대해서도 무척 신경을 써야 할 것으로 보인다. 전통과 변화의 경계에 서 있는 지금의 상황에 대해 고심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3포인트 스타 엠블럼을 달았다면 기술력을 비롯한 모든 면에서 최고여야 하며, 그렇지 못하다면 그 엠블럼의 가치는 빛을 잃어갈 수 있다. 최고의 자리는 올라서는 것보다 지키는 것이 더 어려운 법 아니겠는가. 지금부터가 메르세데스-벤츠, 그리고 E클래스에겐 중요한 시점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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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승기 이미지 업데이트 예정 (상세 이미지는 프리미엄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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